성연철 ㅣ 전국팀장
시인은 적었다. ‘모든 사라지는 것들은 뒤에 여백을 남긴다.’
대백이 지난달 30일 문을 닫았다. 1969년부터 52년 동안 대구 시내 동성로 한복판을 지키던 건물 안으로 이제는 들어갈 수 없다. 사흘 뒤에는 서울 종로3가 서울극장이 9월부터 문 닫는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1979년부터 42년 동안 같은 자리에 서 있던 극장이다.
그게 사람이든 사물이든, 늘 그 자리에 있을 것이라 여긴 존재가 어느 날 사라지는 것은 무척 당혹스러운 일이다. 소설가 권여선은 “죽음은 우리를 잡동사니 허섭스레기로 만들어 버려요. 순식간에 나머지 존재로 만들어 버려요”라고 쓰기도 했다. 죽음의 상실감에야 견줄 바 없겠지만, 익숙한 것과의 이별은 늘 고통스럽다.
대구·경북 사람들은 대구백화점을 ‘대백’으로 불렀다. 줄임말이 지금처럼 대세가 아니던 시절부터 경대(경북대)가 경대이듯 대백은 대백이었다. 대백 정문 앞은 약속을 기다리는 사람들로 붐볐다. “시내서 보자” 하면 대백 아니면 제일서적(역시 2006년 사라졌다)이었다. 폐점 당일 풍경을 담은 <한겨레> 르포 기사에서 한 50대는 “지금은 부산에 살지만 대구 사람으로서 만남의 장소가 사라진다는 게 너무 섭섭하다. 친구하고 마지막으로 ‘대백 정문에서 보자’ 하고 왔다”고 말했다. 추억은 힘이 세다. 서울극장 역시 종로3가의 이정표 구실을 했다. 극장 주변은 500원이 싼 조조를 기다리는 하릴없는 대학생이나 이야깃거리를 만들려는 연인들로 북적였다.
누구에게나 그렇듯 대백과 서울극장에도 전성기가 있었다.
대백은 1993년 ‘한강 이남 최대’라는 간판을 앞세워 대백프라자를 개장했다. 번쩍이는 입구에 있던 옥(玉) 배는 아직도 눈앞에 있는 듯 기억이 생생하다. 잠깐 옆길로 새지만, 대백과 경쟁했던 동아백화점은 1988년 서울 쁘렝땅 백화점을 열었다. 지방 백화점의 서울 역진출 1호였다. 서울극장도 1989년 상영관을 3개로 늘려 한국 최초 복합상영관(멀티플렉스)이 됐다.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사람들은 단성사와 피카디리, 서울극장을 오갔다.
그러나 늘 이어질 것만 같던 시절은 길지 않았다.
대백은 이른바 ‘서울 백화점’들이 진출하면서 더는 버티지 못했다. 2011년 현대백화점이 시내에 들어섰고, 5년 뒤에는 새로 지은 동대구터미널에 신세계백화점이 들어섰다. ‘서울 백화점’들은 외양에서부터 지역 백화점을 압도했다. 어느 날 한참 만에 찾은 대백은 ‘어릴 적 넓게만 보이던 좁은 골목길’ 같았다. 붐비는 ‘서울 백화점’의 식품관과 한산한 대백의 모습은, 돌이켜보건대 쇠락의 징후이자 복선이었다. 대구 야구장인 라이온스파크 펜스조차 서울 강남 병원 광고가 차지하는 ‘서울·수도권’ 시대다. 여기에 1년 반 넘게 이어지는 코로나는 결정타를 날렸을 것이다.
대백이 마지막 지역 백화점일 정도로 이미 오래전 다른 지역 백화점들은 간판을 내렸다. 부산에서는 미화당과 유나, 태화백화점이, 대전에서는 동양백화점이, 광주에서는 화니백화점이 일찌감치 퇴장했다.
서울극장도 마찬가지였다. 씨지브이(CGV), 메가박스 등의 멀티플렉스 상영관은 서울극장을 ‘구식’으로 밀쳐버렸다. 넷플릭스와 와챠 등은 아예 극장 생태계를 바꿨다. 코로나19는 애써 더 언급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서편제>로 흥행했던 단성사도, <접속>의 배경이던 피카디리도 2000년대를 넘기지 못하고 각각 역사 영화관과 씨지브이 피카디리1958로 바뀌었다. 늦더위가 가실 9월이면 종로 트로이카 영화관 시대에도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간다.
누군들, 무엇인들 시대와 세월을 거스를 수 있을까마는 두 곳의 황망한 이별 소식에 영화관 주변을 어슬렁거리던 어설픈 ‘씨네 키드’이자 ‘백화점 키드’로서 그저 헛헛해 쓴다. 동성로 혹은 종로3가역을 지나며 “그때, 저기에 말이야…”라고 할 날이 이렇게 빨리 올 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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