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희 | 이화여대 사회학과 교수 진보의 갈래가 다양한 것처럼, 보수 역시 수많은 분파로 구성되어 있다. 신중했지만 항상 반개혁적이지만은 않았던 에드먼드 버크로부터 시장주의자인 밀턴 프리드먼에 이르기까지. 그렇지만 우리의 보수를 정의하기란 그다지 어렵지 않다. 말 그대로 현상(Status quo)을, 가진 것을 그대로 지켜내는 것. 그래서 이런 자연스러운 본능을 옹호하기 위해 특별한 논리가 필요하지 않았다. 그런데 최근 보수는 몇 발짝 더 후퇴하여 현 상태가 아닌 과거까지 지켜내겠다는 의지를 보여주고 있다. 야당의 여성가족부 폐지 주장은 통일부 폐지론에 비해 현저히 더 집요하며 비논리적이다. 스웨덴에서 실업부를 창설하라는 요구가 있었을 때, 당시 올로프 팔메 총리는 “내각의 모든 장관이 실업과 싸우는 전사”이므로 그럴 필요가 없다고 답했다. 모든 부처의 장관이 성평등을 위해 싸우는 전사라면 여성부 폐지에 반대할 이유가 없겠지만, 그럴 리가 만무하지 않은가. 보수가 비판하는 여성부의 문제는 대부분 타 부처의 무관심과 비협조로부터 기인한다. 서로 다른 남녀에 대한 동일한 처우가 불평등을 발생시킬 수 있지만, 그렇다고 여성을 특별히 배려하는 정책만 사용하면 그로 인해 또다시 고용주의 차별 유인이 발생할 수 있다. 여성만 사용 가능한 휴가가 못마땅하다면 남성도 함께 당연한 권리로서 병가를 자유롭게 쓸 수 있도록 만들 수도 있다. 좋은 보수라면 인구절벽을 앞두고 모든 생산가능인구의 경제활동인구로서의 전환이 시급해질 이 중요한 시기, 여성을 다시 이등 시민으로 떨어뜨릴 궁리에만 매진하진 않았을 것이다. 그 대신 공정한 시장경쟁을 가로막는 차별 금지를 통해 여성과 남성 모두 노동시장과 가정의 삶에서 평등하게 공존할 방법을 찾아주었을 것이다. 최근 넘쳐나는 반노동, 반복지적 언급들도 과거로 회귀하고자 하는 일념을 반영한다. 주 120시간 노동은 어처구니가 없어 웃어넘긴다 해도 시도 때도 없는 노동조합에 대한 공격은 정치가로서의 기본 자질마저 의심케 한다. 독재 시기 보수 정권이 만든 기업별 노조의 칸막이에 막혀 전체 노동자의 이해를 대변하지 못하는 노동운동의 한계는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헌법이 보장하는 기본권에 의거해 만들어진 조직을 ‘죽여야’ 청년이 산다니, 그렇다면 노동운동을 하는 청년은 죽어야 하는가 살아야 하는가.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오른쪽), 윤석열 전 검찰총장이 25일 서울 광진구 한 치킨집에서 만나 건배하고 있다.공동취재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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