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결]
강병철 ㅣ소아청소년과 전문의
신은 믿지 않지만, 악마는 믿는다. 신은 한번도 본 적이 없지만, 악마는 여러번 보았기 때문이다. 내 어릴 적에 자기 아니면 안 된다며 반대자를 모조리 잡아 가두거나, 암살한 사람이 있었다. 악마가 총을 맞고 죽었다니 아마 은제 탄환을 썼던 모양이다. 조금 커서는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시민들을 상대로 ‘작전’을 펼쳐 피칠갑을 한 악마가 태어나는 모습도 보았다. 지금도 서울 어딘가에 가면 울부짖는 소리가 들린다 전한다. “당신 누구야!”
방방곡곡 멀쩡하게 흐르는 강물을 막겠다고 설치던 이는 재물에 눈이 먼 걸귀였다. 도둑질이 탄로 날까 봐 국민을 감시하고, 전직 대통령에게 누명을 뒤집어씌웠다. 언어 능력이 몹시 떨어지는 꼭두각시를 내세운 이들이 온갖 관직을 나눠 갖고 분탕질 치는 모습도 보았다. 생때같은 아이들 삼백을 전세계가 지켜보는 앞에서 바다에 수장했으니 참으로 무능한 악마들이 아닐 수 없다.
모두가 금메달과 쇼트커트와 쥴리 벽화에 마음을 빼앗긴 동안, 아들이 아비를 살해하려던 사건이 있었다. 10대 아들은 조현병이었다. 60대 아비가 잠든 동안 흉기로 어깨와 목을 여러차례 찔렀다. 아버지는 다행히 목숨을 건졌으나, 아들은 체포되었다. 큰 사건이 아닌데도 댓글이 많이 달렸다. 거개가 조현병 환자를 ‘악마화’하는 악플이다. 정신병원을 더 지어 영구 격리하란다.
학문적 분류는 아니지만, 나는 장애를 신체장애, 정신장애, 발달장애로 나누어 본다. 서럽고 힘겹지 않은 장애가 어디 있을까마는, 정신장애인과 발달장애인은 종종 자기 입장을 조리 있게 설명하지 못하기에 양극화된 사회에서 쉽게 악마화된다. 강남역 살인사건의 범인은 “여혐으로 인한 살인자”가 되었지만, 보살핌 받지 못한 중증 조현병 환자이기도 했다. “파렴치한 연쇄살인범”이 된 진주 주공아파트 방화살인사건의 범인 역시 제대로 돌볼 사람이 없는 조현병 환자였다.
여혐론자가 아니었다는 말이 아니다. 연쇄살인범 맞다. 그러나 낙인과 악마화로는 진실의 일부만 볼 수 있을 뿐이다. 이런 일이 또 생기는 것을 막을 수 없다. 조현병 환자는 인구의 1%, 우리나라에만 50만명이다. 치료를 잘 받으면 어려움은 따르지만 나름 보람 있게 살면서 사회에 기여할 수 있다. ‘치료를 잘 받는다’는 게 무슨 뜻일까? 세가지다. 약을 잘 먹어야 하고, 가족의 따뜻한 지원이 있어야 하며, 사회에서 차별받지 않아야 한다. 말은 쉽지만 꾸준히 약을 챙겨 먹는 데만 몇년씩 걸리는 수도 많다. 가족 내에서 미움과 구박을 받거나, 가족 자체가 위기를 겪거나 와해되기도 한다. 이웃이나 사회가 나서야겠지만, 지금 분위기로는 잠꼬대 같은 소리다. 돌봄, 지원, 관심, 포용이 절실한데, 사회는 단죄에만 골몰한다. 약을 먹으면 안 된다느니, 조현병은 의사들이 만든 병이라느니 헛소리를 늘어놓는 사이비들조차 강단 있게 처리하지 못하는 형편이다.
강남역 사건을 돌아볼 때마다 나는 가슴을 친다. 제 목소리를 낼 수 없는 정신장애인들이 그 분노와 관심과 파급력을 백분지 일이라도 누렸다면 뭔가 조금이라도 달라지지 않았을까? 박해받는 약자가 다른 박해받는 약자를 품지 못한다면 그들의 도덕적 힘은 무엇인가? 약자와 약자가 연대하지 못한다면 기득권의 강고한 성벽을 어떻게 무너뜨릴 것인가?
대선을 앞두고 샅바 싸움이 한창이다. 순전히 운이 좋아 악마들이 날뛰는 시대를 살아남은 중늙은이의 눈에는 그들 중에도 이마에 뿔이 돋고, 엉덩이에 꼬리 달린 악마들이 많이 보인다. 쉿, 입바른 소리는 금물이다. 무고한 사람이 억울하게 도륙당하고, 집안까지 풍비박산 나는 꼴을 얼마 전에도 보지 않았던가. 세상에 악이 많다지만 남을 가두고 죽이고, 나라의 곳간을 털어 사욕을 채우는 것보다 나쁜 짓이 얼마나 있으랴. 그런데도 사람들은 공과를 따지고 역사적 평가를 한다며 입씨름을 벌인다. 그들에게는 환호하면서, 불쌍한 환자들만 너무 쉽게 악마라 칭한다. 이 또한 괴이한 일이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