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신문>은 우리 근대 신문의 효시이자 상징이다. 1957년 제정된 ‘신문의 날’은 <독립신문> 창간일(1896년 4월7일)을 기리는 의미가 크다. 근대 신문에서 떠오르는 ‘자유’ ‘민주’ ‘인권’ 같은 신화적 이미지도 당연하다는 듯이 <독립신문>에 돌아간다. 그러나 이 신문의 실제 보도가 어떠했는지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 <독립신문>에는 민족과 백성을 위하는 보도와 외세 의존적이면서 민중을 불신하는 보도가 모순적으로 공존했다.
가령 군주제 아래에서도 당당히 참정권을 주창했으나, 보통선거권에 대한 요구로 나아가는 법은 없었다. 오히려 조선 백성은 민권이 무엇인지 모르니 함부로 그것을 주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또 오늘날 국회의원 격인 중추원 의관의 절반을 <독립신문> 발행 주체인 독립협회가 뽑아야 한다(헌의 6조)며 왕권에 도전하면서도, 정작 백성의 저항권은 인정하지 않았다. 심지어 동학군을 ‘비도’라고 몰아세우며, 외국 군대를 불러들여 진압하라고 요구했다.
민주주의가 성숙하지 못했던 시대의 한계로 볼 여지도 없지 않다. 그러나 <독립신문> 창간 주역 대다수가 머잖아 일제에 부역하며 식민지 귀족의 삶을 살았던 데서 다른 이유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한국 자유주의의 기원>을 지은 이나미 박사(정치학)는 <독립신문>의 모순적이고 이중적인 태도를 이해하려면 ‘자유주의’의 분석 틀이 필요하다고 짚는다. 민주주의로도, 민족주의로도 귀환할 수 없었던 식민지 엘리트들이 자유주의와 조우했던 사정은 뭘까?
지은이는 자유주의가 “봉건제와 절대주의를 극복하기 위해 자유 평등의 인간상과 합리주의를 계승했지만, 다른 한편으로 재산과 교양을 지표 삼아 빈곤 계급을 정치 과정에서 제외하고 자산가 계급에 봉사하는 이중성을 내포하고 있었다”는 <브리태니커>의 정의를 들어, 신분제를 비판하면서도 기득권을 붙들려 했던 <독립신문> 창간 주역들의 ‘선택적’ 자유주의를 꼼꼼히 논증한다.
오늘날 한국 보수 신문들의 이념과 태도가 <독립신문>의 자유주의를 아득히 초과하고 있음은 굳이 논증할 필요도 없다. 보도와 관련한 ‘징벌적 손해배상제’ 입법을 둘러싸고 소란한 지금, 저들이 말하는 언론의 자유와 표현의 자유는 과연 누구의 자유이며, 누구를 위한 자유일까 곱씹어보게 된다. 100여년 전 <독립신문>의 그림자가 너무 짙고도 깊다.
안영춘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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