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안 | 시인·<동시마중> 편집위원
지난달에 다녀온 제주의 한 초등학교 어린이들에게서 편지 묶음을 받았다. 잘 제본된 표지에는 ‘이안 작가님께’란 제목 아래 강의 마치고 함께 찍은 사진이 컬러로 인쇄돼 있다. 모두 마스크를 썼다. 겨우 한 달이 지났을 뿐인데 어린이들 얼굴이 가물가물하다. 한 장씩 넘기며 기억을 더듬어 본다. “안녕하세요. 저는 ○○초등학교 4학년 2반 ‘우리 집 강아지’를 썼던 ○○○입니다.” 사진함을 뒤져 보니 찍어 둔 시가 있다.
“우리 집 강아지는/ 비가 후두둑 떨어지면/ 쫄딱! 작아지고// 햇빛이 비추면/ 복실복실 커진다.// 털을 빗어 주면/ 다시 작아진다.”(전문) 강아지 모습이며 강아지를 바라보는 아이의 마음이 눈에 선하다. 비에 쫄딱 젖었다고 하면 조금쯤 흔한 표현이었을 텐데 “쫄딱! 작아지고”라고 해서 “후두둑” 떨어지는 소나기의 급작스러움에 걸맞은 짝이 지어졌다. 강아지가 “복실복실 커진다”라고 쓴 것도 강아지를 사랑하는 마음이 있어서 가능한 발견일 테다. 이런 시를 읽으면 마음이 놓인다. 어린이의 눈과 마음에 또렷한 사랑이 맺혀 있으니까. 조화로운 리듬을 갖고 있으니까.
“안녕하세요. 4학년 2반 ○○○입니다. 작가님이 제가 쓴 시를 페이스북에 올려 주셔서 너무 감사해요!” 사인 받으러 와서 강의 중에 썼다며 시를 내밀던 어린이. 그럼, 생각나고말고. “할머니랑/ 티비를 봤다// 뿡// 방귀를 꼈다.// “음, 보석 냄새”// “할머니, 보석이 냄새나?”// “아니, 방귀 냄새””(전문) 제목은 ‘보석 냄새’다. 할머니와 주고받은 말이 재밌게 놓였다. 사랑스러운 관계다. 어린이가 힘들 때마다 등을 다독여 주는 보석 같은 말이 될 거다. 동시 작가도 장래희망 후보로 등록해 놓았단다.
“안녕하세요. 저는 ‘쏨뱅이는 쏨뱅’을 쓴 ○○○입니다.” 바로 떠오른다. 말이 너무 재밌지 않은가. “구멍 낚시를 하러/ 뚜벅뚜벅// 구멍 낚시 할 곳을 찾아/ 두리번두리번// 낚시를 하니/ 낚싯대가 휜다./ 화악// 휠을 감으면// 쏨뱅이가 쏨뱅/ 하고 나온다.// 그러면// 오늘 저녁은/ 쏨뱅이 구이!”(전문) 유쾌하고 날렵하다. 1연과 2연에서 살짝 기계적 리듬이 느껴졌으나 3연 “화악”에서 긴장과 응축이 발생하면서 시는 팽팽한 활력을 얻는다. 연 구분도 적절하다. 본문에는 “쏨뱅이가 쏨뱅”으로 쓰고 제목에는 “쏨뱅이는 쏨뱅”으로 조사 하나를 슬쩍 바꾸어 단 것도 ‘꾼’답다. 이런 어린이랑은 시 이야기 같은 거 집어치우고 당장 쏨뱅이를 만나러 바다에 나가 보자고 하고 싶다.
선생님이 만들어 어린이들에게 나누어 주었을 편지지 아래쪽에는 ‘마음을 담아 작가님께 드리고 싶은 그림 또는 시 선물’ 칸이 있다. 자기의 ‘신작시’를 보여 주는 어린이, 돈을 그려 넣은 어린이(좋은 마음으로 받았다), 공책과 연필, 만년필을 그린 어린이…. 한 어린이는 잉크와 깃털 펜을 그리고 이렇게 썼다. “깃털 펜으로 글이나 그림을 그리면 새로운 느낌이 나요. 한번쯤은 써 보시면 좋겠어요.” 사랑이 아니고서야 어떻게 이런 말을. 그런데 다녀와서도 유독 안 잊히는 어린이가 있었다. 이 어린이는 선물 칸에 금붕어, 다람쥐, 제비를 그리고, “외롭지 않도록 작은 말동무들을 드립니다!”라고 써 놓았다. 시 제목을 보고 놀랐다. ‘저에게 가장 친한 친구는 악마입니다!’라니.
“2학년 때 나는 친구가 그렇게 많지/ 않았다! 있어도 약속이 생겨 못 노는 친구뿐/ 그런 지 며칠이 지나고 밤이 되어 자는데/ 악마가 나타나서 같이 놀았다 너무 행복/ 했는데……/ 꿈이었다…. 근데 눈이 부어 있었다./ 너무 기뻐서 울었나 보다./ 꿈에서 또 보고 싶다.”(전문)
지어내서 쓸 수 있는 시가 아니다. 얼마나 외로웠을까. 이런 어린이가 적지 않을 것이다. 그 곁에 금붕어, 다람쥐, 제비 같은 시를 놓아 주고 싶다. 외로운 시간에 곁이 돼 줄 수 있는 작은 말동무들을. 강아지, 보석 냄새, 쏨뱅이 같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