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국가가 ‘무장투쟁’을 주장했던 1970~80년대 마오주의자들을 탄압하여 양심수들을 양산했다면, 과연 오늘날 그들은 이와 같은 생산적이며 사회적으로 매우 필요한 역할들을 맡을 수 있었을까? 결국 정치적 소수에 대한 톨레랑스는 끝에 가서 노르웨이 사회와 문화, 정치를 더 풍요롭게 만든 셈이다.
박노자의 한국, 안과 밖
요즘 한국은 잔칫날 기분이다. 유엔무역개발회의(UNCTAD)가 한국을 ‘선진국’으로 인정했기 때문이다. 사실 굳이 이 발표가 없어도 세계체제론적 차원에서 한국이 이미 준핵심부가 아닌 핵심부 국가가 되었다는 것은 쉽게 알 수 있다. 구매력 기준으로 계산된 한국의 1인당 국내총생산(GDP)은 이미 일본을 추월해 유럽연합의 평균과 비슷해졌을 뿐만 아니라, 한국은 자본의 수입국에서 수입국이자 수출국이 되었다. 지금도 국내 은행업 등 금융계에서 외국 자본은 적지 않은 비중을 차지하지만, 동시에 삼성 같은 국내 대기업들의 현지 법인은 예컨대 베트남 수출액의 3분의 1이나 생산하고 현지에서 15만명 이상을 고용하는 등 동남아시아와 같은 주변부 지역에서 ‘지배자’로 군림한다. 자국 경제 영토의 해외로의 확장이야말로 핵심부 국가들의 중요한 특징 중의 하나인데, 그런 의미에서는 한국도 그 그룹에 속한다는 데에 이의를 제기할 수는 없다.
그러나 마냥 기뻐만 하기 전에 한번 생각해보자. 세계체제론 차원의 ‘핵심부 국가’나 유엔무역개발회의가 말하는 ‘선진국’은 순전히 경제력에 대한 평가일 뿐이다. 이 평가는 해당 국가의 사회나 정치 등과 무관하다. 단지 세계 경제의 ‘먹이사슬’에서 차지하는 위치를 이야기할 뿐이다. 흑인들에게 사실상 시민권을 불허했던 1950년대 미국이나, 재일 조선인들을 ‘비국민’으로 취급했던 고속 성장 시대의 일본 역시 핵심부 국가였다. 1년에 경찰이 약 1천명의 시민을 사살하는 미국도, 경찰들도 무기를 평상시에 휴대하지 않는 노르웨이도 경제적으로 똑같이 핵심부에 속한다. 그런데 그들의 사회적 일상은 서로 판이하게 다른 것이다. 한국의 일반에서 쓰이는 ‘선진국’이라는 명칭은, 짐작건대 무장한 경찰들이 소수자들을 언제든지 사살할 준비가 되어 있는 사회라기보다는, 차라리 일상이 비폭력화되어 있는 북유럽의 복지국가 같은 곳을 의미할 것이다. 일상 언어에서 사용되는 ‘선진국’이란 단어는, 경제적 범주의 용어라기보다는 ‘바람직한 사회’의 의미가 더 강하기 때문이다. 즉, ‘우리가 살았으면 하는’ 사회를 뜻하는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우리는 아직 샴페인을 마시고 자축하기에는 이르다. 일상이 비폭력화되어 있고 평화롭고 안정적인 북유럽 복지사회의 가장 핵심적인 특징은 이념이나 사회·문화적 ‘톨레랑스’이기 때문이다. ‘톨레랑스’는 종족적 내지 종교, 생활, 문화적 소수자에 대한 ‘관용’을 의미하며, 무엇보다 특히 이념적 내지 정치적 소수 의견, 조직에 대한 존중을 의미한다. 하지만 양심수가 여전히 감옥에 갇혀 있는 한국과 같은 나라를 ‘톨레랑스의 나라’로 여기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하다. 이 차원에서 한국과 북유럽이 얼마나 다른가를, 내가 노르웨이에서 속해 있는 정당 이야기를 하면서 설명해보고자 한다.
나는 한국에서는 노동당 소속이지만, 노르웨이에서는 이와 동시에 적색당의 지역위원회에서 활동한다. 적색당은 2007년에 창당된 급진 좌파 정당으로, 현재 지지율은 6% 정도 된다. 국회의원은 아직 1명이지만, 곧 2~3명으로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즉, 현재로서 전형적인 의회주의 좌파 정당이다. 그러나 본래 적색당의 모체는 노르웨이의 노동자 공산당(1973년 창당), 즉 노르웨이의 마오주의 운동이었다. 노동자 공산당의 전성기에 그 당의 정식 당원은 3400명 정도였지만, 마오주의자의 전체 수는 약 2만명으로 추산되어 유럽 최강의 마오주의 운동이었다. 노르웨이의 마오주의자들은 의회주의 전략을 부정하면서 무장혁명과 무산계급의 독재 정권을 지향했다. ‘무장혁명을 준비한다’는 말을 대놓고 당 강령에 쓰기도 하고, 기관지인 <계급투쟁>(Klassekampen)에도 거의 매호 ‘무장투쟁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당의 출판사인 ‘시월사’(Oktober)에서 스탈린과 마오의 저서를 번역해 지속적으로 출간했다. “제3세계를 착취하는 제1세계”에 속한다는 것에 엄청난 자책감을 느꼈던 노르웨이의 마오주의자들은, 제3세계 민중을 자본의 속박으로부터 해방시킬 세계 혁명을 노르웨이에서 일으키려 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소련과 국경을 접하며 냉전의 최전선에 선 노르웨이의 국가는 이 운동에 어떻게 대응했을까? 물론 마오주의자들을 비밀리에 감시하긴 했다. 한데 마오주의자들이 실질적인 ‘폭력’을 행사하지 않는 이상 국가 역시 그들을 탄압할 생각은 안 했다. ‘무장혁명’에 대한 이야기는 ‘표현의 자유’ 차원에서 관용되며, 노동자 공산당은 여느 정당처럼 합법적 활동을 마음껏 할 수 있었다. 결국 중국의 자본화와 소련의 몰락으로 ‘무산계급 독재’에 대한 이야기는 저절로 족적을 감추게 되고 당은 1990년대 초부터 여성주의와 환경운동, 반전평화로 활동의 초점을 바꾸었다. 오늘날 그 후속 정당인 적색당은 복지국가 노르웨이의 자본이 외국에서 착취하는 현지 노동자나 노르웨이에서 고생하는 외국인 노동자의 권익을 옹호하고 복지시설의 민영화를 반대하며 노르웨이 군대의 아프가니스탄 파병 같은 해외 파병에 맞서 싸운다. 대표적인 기후정의 옹호와 군사주의, 신자유주의 반대의 정당이 된 것이다. <계급투쟁>은 노르웨이 지식인이면 꼭 봐야 할 ‘지식인 신문’이 되었고, ‘시월사’는 노르웨이 시, 소설 문학의 가장 우량한 출판사가 되었다. 만약 국가가 ‘무장투쟁’을 주장했던 1970~80년대 마오주의자들을 탄압하여 양심수들을 양산했다면, 과연 오늘날 그들은 이와 같은 생산적이며 사회적으로 매우 필요한 역할들을 맡을 수 있었을까? 결국 정치적 소수에 대한 톨레랑스는 끝에 가서 노르웨이 사회와 문화, 정치를 더 풍요롭게 만든 셈이다.
북유럽의 어느 선진국에서도 지금 8년째 옥고를 치르고 있는 이석기 전 의원의 투옥과 같은 상황을, 죽었다 깨어나도 도저히 ‘상상’할 수 없다. 이석기 전 의원의 유죄 판결의 근거가 된 그 ‘90분 연설’에 설령 다소 과격한 언사들이 포함되어 있었어도 그 어떤 ‘선진국’도 (특정 종족 등을 겨냥하는 혐오 표현이나 구체적인 특정인을 위협하는 협박, 아니면 모욕이나 명예훼손 등을 제외한) ‘언어’ 그 자체를 처벌하지는 않는다. 소수 의견을 표현할 자유가 있어야, 다양성을 자랑하는 진정한 민주 사회가 만들어진다. 이석기 전 의원이 사면, 석방되어야 우리 사회가 톨레랑스가 있는 진정한 사회·정치적인 선진국이 되는 길목에 들어설 수 있을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양심수 없는 나라, 모든 의견이 존중받는 선진국을 함께 만들어나가자는 의미에서 이번 광복절 특사에 이석기 전 의원을 포함시키기를, 간절히 희망한다.
노르웨이 오슬로대 교수·한국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