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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박노자의 한국, 안과 밖] 우크라이나, 미국 실패의 그림자

등록 2024-01-16 16:10

중동에서 이스라엘과의 동맹을 최우선시하는 미국은 튀르키예나 걸프 국가들에 대러 제재에 가담해야 할 이유를 설득력 있게 제시하지 못했다. 가자지구에서 제노사이드에 준하는 이스라엘의 만행이 지속되고 있는데도 전혀 바뀌지 않는 미국의 친이스라엘 편향 외교는, 푸틴과 중국이 중동을 포함한 ‘글로벌 사우스’의 민심을 손쉽게 획득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과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지난해 12월12일 정상회담 뒤 공동기자회견장에 들어서고 있다. 워싱턴/UPI 연합뉴스

박노자 | 노르웨이 오슬로대 교수(한국학)

1950~1953년 한국전쟁이 그랬듯이 현재 우크라이나 전쟁의 성격 역시 복합적이다. 한국전쟁은 본래 내전이라고 할 수 있는 두 분단국가의 무력 갈등이었다가, 국제전 즉 중-소블록과 미국 중심 서방블록 사이 대결로 비화했다. 반면, 우크라이나 전쟁은 애당초 과거 제국을 복원하려는 푸틴의 제국주의적 침략으로 시작됐다. 하지만 푸틴의 속전속결 계획이 실패로 끝나고 미국과 그 동맹국들도 관여하게 되면서, 이 전쟁도 벨라루스와 북한, 이란 등 지원을 받는 러시아와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 사이의 국제전, 즉 간접적으로는 미-러 전쟁의 모습도 아울러 띠게 됐다.

한국전쟁과 비교를 계속하자면, 이번 미-러 간접전에서 미국은 70여년 전과 비교하면 훨씬 더 압도적 힘의 우위를 보유하고 있다. 군비 지출만 봐도 미국의 군사 예산은 러시아보다 10배 정도 많다. 미국산 무기의 위력, 예컨대 미국산 대포들의 사정거리가 러시아의 그것보다 더 길다는 점은 러시아 군인들도 인정한다. 그런데도 지난해 우크라이나 전장에서 미국은 훨씬 더 약한 러시아를 상대로 그 어떤 유의미한 승리도 거두지 못했다. 러시아가 점령한 우크라이나 영토 비율(약 18%)은 줄긴커녕 오히려 약간 늘어났다.

미국이 간접 참전에 나선 목표인 ‘러시아 군대 약화하기’ 역시 뜻대로 되지 못했다. 전선이 교착된 진지전이 되고 만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현장에서 현재 우크라이나군보다 5배 더 많은 포탄을 매일 사용하는 러시아 군대가 약화했다고 보기는 힘들 것이다. 2022년 2월24일 이후 초강대국 미국으로부터 1000억달러(약 134조원) 상당의, 역사적으로 파격적인 규모의 지원을 받은 우크라이나가 미국만큼의 재력이나 군사기술을 보유하지 못한 러시아를 이기지 못하고 수세에 몰리는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전쟁의 승패는 여러 레벨에서 결정된다. 전장에서의 전술·전략 등은 가장 기초적 레벨이다. 한데 전장에서 이기려면 보급이 뒷받침돼야 한다. 즉 군사물자 증산 등 ‘생산 전쟁’에서 승리해야 한다. 또한 전쟁에 필요한 물자를 계속 조달받자면 교역을 지속해야 하기에, 상대국을 외교·교역 차원에서 성공적으로 고립시켜야 전쟁 승리의 가능성도 커진다. 그리고 자국은 물론 제3국 국민, 나아가서 전쟁 상대국 국민에게까지 설득력 있는 전쟁 목표 등에 대한 ‘서사’를 제시해야 여론 싸움에서 이기고 상대국 민심을 교란해 그 정권의 입지를 약화할 수 있다.

이 네가지 레벨에서 여태까지 우크라이나 쪽에서 결정권을 행사해온 것은 미국이었다. 그리고 이 네가지 레벨에서 미국이 여태까지 보인 것은 주로 참담한 실패뿐이었다.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왼쪽)와 우크라이나에서는 올해도 전쟁이 이어지고 있다. AFP 연합뉴스

전장에서의 전략·전술을 이야기하자면, 우크라이나에 전세가 아직 다소 유리했던 2022년 말 우크라이나군은 남부 지역 탈환, 그리고 크림반도로 진격 계획을 펜타곤(미 국방성)에 제출했다는 점부터 언급해야 한다. 아직 남부에서 러시아의 방어선이 구축되지 않았던 그 시점에서, 미국산 우수한 무기로 무장하여 그때만 해도 사기가 높았던 우크라이나군은 어쩌면 푸틴에게 역사 교과서에 오래 남을 완패를 안길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한데 미-중 갈등 등 여러모로 긴장이 고조된 시국에 푸틴을 너무 궁지에 몰면 안 된다고 판단한 펜타곤은 이 계획을 수락하지 않았다. 상위 파트너인 미국의 이런 의중 앞에서 우크라이나는 울며 겨자 먹기로 대신 북부 지역 탈환에 초점을 맞췄고, 지난해 여름에야 남부 지역 탈환을 위한 ‘대반격’을 시도했지만 이미 구축된 러시아의 방어선에 막혀 크나큰 손해만 입고 말았다. 푸틴과 타협의 여지를 남기고자 하는 미국의 일관성 없는 태도는 결국 우크라이나 병사들의 엄청난 희생을 무의미하게 만들고 말았다.

그 희생을 더 크게 만든 것은 대포의 위력에 의존하는 진지전 상황에서 가장 중요한 전쟁물자가 된 포탄 등 증산에 미국이 계속해서 실패한 점이다. 1년에 150여만발의 포탄을 생산하고, 거기에 벨라루스나 북한으로부터 포탄을 수입할 수 있는 러시아에 동등하게 맞서려면 우크라이나도 이 정도의 포탄이 필요하다. 한데 지금 미국이 1년에 생산할 수 있는 포탄 수는 33만6천발에 불과하고, 유럽 전체의 포탄 생산능력 역시 그 정도 이상이 안 된다. 러시아는 여전히 국영기업인 소련 시대의 포탄제작소를 보유하고 있지만, 우크라이나 전쟁이 1~2년 뒤 끝나고 나면 포탄 수요가 급감할 것이라고 내다보는 구미권 민영 군수회사들은 손쉽게 포탄 증산에 투자하지 못한다. ‘이윤’을 최우선으로 고려해야 하는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는, 이처럼 전시 상황에서 푸틴식 국가자본주의를 이기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전쟁에서 이기려면 무기 제조에 필요한 부품이나 기계 등을 중국이나 걸프 지역 국가 내지 튀르키예 등을 통해 수입하고 있는 러시아의 교역망을 차단해야 했다. 한데 준동맹인 중-러 관계는 그렇다 치더라도, 중동에서 이스라엘과의 동맹을 최우선시하는 미국은 튀르키예나 걸프 국가들에 대러 제재에 가담해야 할 이유를 설득력 있게 제시하지 못했다. 가자지구에서 제노사이드에 준하는 이스라엘의 만행이 지속되고 있는데도 전혀 바뀌지 않는 미국의 친이스라엘 편향 외교는, 푸틴과 중국이 중동을 포함한 ‘글로벌 사우스’의 민심을 손쉽게 획득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었다. 거기에다 독재자 푸틴이 파괴한 러시아의 민주주의 회복도 아닌 러시아의 ‘국력 약화’를 전쟁의 목표로 공공연하게 제시한 미국은, 러시아의 일부 친서방 중산층까지도 전시 상황에서 푸틴을 조건부 지지하게 하였다.

푸틴의 침략에 맞선 우크라이나 민중의 상상을 초월한 희생에도 불구하고, 미국에 대한 우크라이나의 군사적 종속, 전시 상황에서 신자유주의적 경제의 한계, 그리고 미국의 근시안적인 국가주의적 접근과 세계체제 주변부에서 미국의 영향력 쇠락은 우크라이나에서 미국이 실패한 원인이 됐다. 이 모든 상황이 우리가 결국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할 교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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