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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뉴노멀-혁신] 혁신의 서사, 서사의 혁신

등록 2021-08-15 17:17수정 2021-08-16 02:05

김진화 ㅣ 연쇄창업가

도쿄올림픽의 여운이 아직 짙다. 제대로 치를 수나 있을까 염려 반 의구심 반, 거기에 폭염까지 더해졌지만 역시나 잔치는 잔치였다. 전세계가 코로나 블루로 몸살을 앓는 탓인지 무관중의 어수선한 분위기에도 경기에 대한 반응은 제법 뜨거웠다. 올림픽이 원래 이랬던가, 우여곡절 끝에 큰 기대 없이 맞이한 올림픽은 그 자체로 서사의 향연이었다. 경기장 안팎의 이야기들이 메달보다 반짝거릴 때가 많았다. 경기 결과, 메달 색깔, 종합 순위 등에 집착하던 한국 사회의 태도가 눈에 띄게 달라졌다는 평가 역시 반가운 대목이다. 동메달에도 심지어 노메달에도 박수와 격려가 이어졌다. 예전 같으면 종주국의 수치였을 ‘태권도 노골드’조차 우리 무예의 세계화라며 개의치 않는 쿨함이라니. “2등은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다”, “일등주의” 같은 호전적 구호가 요란했던 그 나라 맞나. 이번 올림픽을 통해 드러난, 결과보다 과정을 중시하는 태도, 패자에 대한 인정과 격려에서 엿볼 수 있었던 품격은 이제 한국 사회의 뉴노멀이 된 것일까.

숨 막히는 더위를 잠시 피하고 싶을 땐 영국 작곡가 본 윌리엄스의 교향곡 7번이 제격이다. 서늘한 웅장함이 일품인 이 작품은 ‘남극’이라는 표제를 달고 있다. 군인이자 탐험가였던 로버트 스콧의 남극 탐험을 모티브로 삼았다. 그것은 처절한 실패였고, 표류와 죽음으로 이어진 비극이었다. 그렇다고 작품이 장송곡처럼 들리지는 않는다. 처음 이 곡을 접했을 때, 공연 팸플릿을 읽어 내려가다 한 대목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도전을) 후회하지 않는다. 우리는 위험을 무릅썼고 위험하다는 사실 또한 알고 있었으며, 사태는 우리에게 불리하게 전개되었다. 그러므로 아무것도 불평할 이유가 없다.” 스콧이 남긴 죽음 직전 일기의 한 구절. 윌리엄스는 이 덤덤한 성찰에 영감을 받아 곡을 만들었고, 영국인들은 도전과 긍지를 발견했다. 노르웨이인 아문센에게 뒤진 패자임에도 공영방송 <비비시>(BBC)가 선정하는 위대한 영국인 목록에 이름을 올리는 이유다.

그 목록의 최상단, 아이작 뉴턴 바로 다음 자리는 공학자 이점바드 킹덤 브루넬이라는 다소 장황해 보이는 이름이 자리하고 있다. 브루넬 역시 쓰디쓴 실패라면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철도 혁명 와중에 스티븐슨과의 궤도 표준 경쟁에서 패배했다. 그럼에도 한계를 뛰어넘는 공학적 도전을 일삼았던 브루넬을 영국인들은 뉴턴 다음으로 존경하는 모양새다.

이와 유사하게 미국에는 이민자 출신의 괴짜 공학자 니콜라 테슬라가 있다. 에디슨과의 전류 전쟁에서 결국 승리했지만 성공은 그의 몫이 아니었고 평탄하지 못한 삶을 영위하다 쓸쓸히 세상을 떠났다. 그럼에도 그가 남긴 도전과 열정의 서사는 영화가 되고 새로운 시대를 선도하는 전기차의 이름이 되어 되살아났다.

테슬라, 브루넬 그리고 스콧의 서사는 여전히 먼 나라 이야기처럼 들린다. 올림픽에 출전한 선수들에게는 관대해진 게 분명하지만 한국 사회의 보편적 서사는 여전히 빛나는 성공과 더 많은 성취, 그리고 승리의 영광에만 그 초점이 맞춰져 있는 것 같다. “내가 나가야 이긴다”는 주장만 난무하는 대선주자들의 지지율 레이스는 요란한데, “대통령이 되어 여러분과 함께 만들고 싶은 나라”에 대한 서사는 좀처럼 들리지 않는다. 신규 상장 열풍 속에 재벌기업, 기술기업 막론하고 시가총액 부풀리기 경쟁의 머니게임 역시 한창이다. 스타트업 역시 너도나도 유니콘이 되겠다고 몸집 불리기에 여념이 없다. 도전의 서사는 간데없고 숫자만 나부낀다.

누구나 혁신을 이야기한다. 그것이 결코 쉽지 않다는 방증이다. 혁신이 어려운 것은 답을 찾기도 어렵거니와 설령 누군가 답을 알아냈다 해도 그게 많은 이들의 공감을 이끌어내는 울림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서사는 집단적 상상력을 자극하는 기제다. 대중을 설득하는 건 결국 서사다. 혁신의 서사를 만들어 가기 위해서는 서사의 혁신부터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 도쿄올림픽에서 가능성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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