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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정희진의 융합] 짧은 머리, 벽화, 마크롱은 무관하다

등록 2021-08-17 04:59수정 2021-08-17 08:16

정희진의 융합 _30
이십대 청년이 먼저 읽고 그리다. 김우석
이십대 청년이 먼저 읽고 그리다. 김우석

융합은 구분·분절할 줄 아는 사유

하나의 원인으로 파악하는

환원주의와 반대

원칙 없는 사람이 원칙주의자

원칙은 경우에 따라 다른 ‘최선의 모색’

운동선수의 단발 비난과 ‘쥴리 벽화’를

똑같은 여성혐오로 볼 때

다른 문제는 은폐되기 마련

윤석열, 마크롱, 존슨의 결혼이 같다는

정치인 발언, 한심하다 못해 절망적

침묵도 판단 능력이 있어야 가능

융합과 가장 상반되는 사고방식을 꼽으라면, 환원주의(還元主義)가 대표적일 것이다. 변화무쌍한 현실을 한 가지 원리로 설명하는 단순 논리다. 언제부터인가 한국인들의 대화는 “하여간 언론이 제일 문제야”라고 끝나는 경우가 많아졌다. 나 역시 이런 식의 발언을 많이 한다. “한국은 서울중심주의가 제일 문제야. 계급, 젠더, 부동산이 다 수도권 집중 때문이야.”

환원주의는 이른바 ‘깔때기 언설’로 만사의 원인이 한 가지라는 얘기다. 환원주의는 바람직하지 않은 사고방식이지만 한편으론 생각할 필요가 없으니 편하고 ‘매력적’이다. 여성주의나 마르크스주의 내부에는 다양한 이론이 있지만, 처음 접할 때는 환원주의에 빠지기 쉽다. 환원주의는 일종의 동어반복이지만 제도권이나 주류의 탄압을 받는 경우에는 그 논리가 더욱 강고해진다.

융합은 환원과 반대의 길을 간다. 환원주의가 멈춤이라면, 융합은 지속적인 이동, 재해석이다. 재해석은 창의력의 발판이고, 창의력이 필요한 이유는 더 나은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다. 융합 능력, 즉 ‘공부를 잘하는 방법’은 기존의 언어를 어떻게 재구성하느냐에 달려 있다. 다른 앎과 만남과 혼란, 기존 개념에 대한 의문, 차이와 경계의 기준을 재설정해서 ‘지금, 여기’ 사안의 성격을 파악할 수 있어야 한다. 환원주의는 이런 과정이 필요 없다. 자신이 믿는 공식에 대입하고, 그것이 옳다고 주장하면 끝이다. 문제는 현실은 언제나 움직인다는 사실.

융합 능력을 갖추기 위해서는 지식, 가치관, 판단력이 바탕이 되어야 하지만, 이 지면에서 여러 차례 언급했다시피, 이는 기존의 학력(學歷) 개념이 아니다. ‘자기 분야’는 살아온 여정이지, 전공이나 전문 분야에 국한되지 않는다. 그래서 누구나 융합적 사유를 할 수 있고 또 해야 한다. 소통 능력이 유난히 떨어지는 이들이 있다. 생각하지 않는 이들은 떠오르는 대로 말하는데, 이는 사회가 정해준 원칙대로 살기 때문이다. 본디, 원칙이 없는 사람이 원칙적이다. 전자는 자신이 만들어가는 갱신의 원칙이고, 후자는 정체된 통념이다.

굳이 ‘위대한 창조’를 위해서가 아니더라도 융합이 필수적인 이유는 세상사 성격이 매번 다르기 때문이다. 모든 문제가 계급이나 젠더 때문에 생기는 것도 아니고, 무엇보다 한 가지 요소로 설명할 수 있는 현실은 없다. 거대 이론이 원칙으로 강요될 때, 지식은 생산되지 않는다. 현실 사회주의의 실패나 국가보안법이 그 사례다. 지식이 생산되지 않을 때 가장 이득을 보는 이들은 기득권층이고, 고통받는 이들은 새로운 현실에 대처할 수 없는 약자들이다.

융합(融合)과 통섭(通攝)은 어감 때문에 ‘더하다, 만난다, 통한다’는 이미지가 강하다. 그러나 구획(區劃)하거나 별도로 떼어내는 것, 절단도 융합이다. 융합 방식은 맥락에 따라 합하거나 분리하는 것이지, 무조건적 만남이 아니다. 합하는 과정에서도 분별(分/別)이 필수적이다. 구분(區分)이 융합의 핵심인 이유다.

똑같은 성격의 세상사는 없어

사건의 기본 성격을 파악하는 일은 공동체의 생존이 달린 중대한 문제다. 특히 “뉴스의 홍수” 시대에는 무엇을 의제로 삼을지에 따라, 많은 사람의 삶이 영향을 받는다. 제대로 판단하지 않으면 해결해야 할 진짜 문제는 잊고 소모, 인간관계 파괴, 불신만 남게 된다.

최근 몇 년간 “이게 실화냐”, “세상이 미쳐 돌아간다” 같은 놀라움과 한탄이 빈번하다. 그중 하나가 20대와 30대를 중심으로 한 젠더 이슈가 아닐까 생각한다. 정확히 말하면, 젠더가 논의되는 방식이다. 사안마다 젠더 문제일 수도 아닐 수도 있는데, 모두 ‘여혐, 남혐’으로 몰고 간다. 남성은 남성대로, 여성은 여성대로 서로 “말이 안 된다”고 주장한다. 나 역시 ‘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매일 놀란다. 일단, 여성에 대한 차별과 폭력이 젠더 갈등, 젠더 전쟁으로 미화되고 있다.

최근 세 가지 뉴스가 있었다. 운동선수의 짧은 머리, 김건희씨의 과거사가 적힌 벽화, 그리고 윤석열씨 결혼을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의 결혼과 비교한 것이다. 마지막 경우는 상대적으로 덜 알려졌지만, 내게는 큰 충격이었다. 세 사건의 성격은 각기 다르다. 그러나 여론은 모두 여성혐오로 수렴되었다. “여성혐오다”, “아니다, 여성들이 먼저 남성혐오를 시작했다”, “여성혐오를 중지하자”….

한자의 ‘혐(嫌)’ 자체가 ‘계집 녀’를 포함하고 있다. 한자를 비롯해 거의 모든 언어에서 부정적인 것은 여성성과 연결된다. 여성혐오는 언어의 기본 구성 원리다. 나는 이 단어의 번역만큼 한국 사회를 후퇴시키는 경우를 알지 못한다. 영어 미소지니(miso+gyny)의 번역인데, 나는 ‘여성혐오’는 필연적으로 ‘남성혐오’라는 어불성설을 초래한다고 여러 차례 주장해왔다. 일본어에서는 번역하지 않고 그냥 ‘ミソジニー’라고 표기한다.

문명은 여성의 타자화로부터 시작되었다. 남성을 인간의 대표로 만들기 위해서는 다른 인간은 배제되어야 했다. 겉보기에 남성과 다른 존재, 타자(the others)가 필요했고 ‘바로 옆에 있는’ 대상인 여성이 가장 적합했다. 백인과 유색인종,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관계가 대칭을 이루지 않는 것처럼 남성과 여성도 대칭적이지 않다. 단지, 가부장제가 인간을 남녀로 구분했기 때문에 여성이 인구의 반이라는 현실이 만들어졌다. 타자 중에서 가장 큰 집단이기 때문에 대칭적으로 보이기 쉽다.

문제 은폐를 위한 혐오설

여성에 대한 비난을 여성혐오로만 설명하는 현상은 바람직하지 않다. 이전에 ‘비해’ 성별보다 개인의 능력이 중시되는 신자유주의 시대다. 개인의 노력으로 사회적 성취를 이룬 일부 여성들이 과잉 재현되고 여성의 목소리가 겨우 드러나기 시작한 현상이, 남성을 미워하고 증오하는 행동인가? 그렇다면 남성을 미워하지 않는 행동은 어떤 행동인가? 국가대표 선수가 졸전을 펼치는 것? 심지어 “페미니스트=범죄자”라고 주장하는 이들 때문에 메달 박탈까지 언급되었다(메달 박탈 여부는 한국 정부가 아니라 국제올림픽위원회(IOC)에서 결정할 사안이다).

이 사건은 젠더 문제처럼 보이지만, 그것만은 아니다. 반례가 수없이 많다. 짧은 머리에 세월호 배지를 달았더라도, 나이 든 평범한 여성에게는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는다. 왜일까.

김건희씨 벽화 사건에서 문제 삼아야 할 것은 그녀의 과거 자체가 아니라 그 과거의 성격이다. 윤씨 부부의 탄생은 검찰의 부끄러운 역사의 결과다. 검사들이 더 잘 알 것이다. 그래서 두 사람은 ‘중요하다’. 검찰 문제에 왜 여성의 섹슈얼리티를 비난하거나 반대로 개방적인 척하는가. 윤씨 측근의 물타기인가, 진보 진영의 무지인가. 어쨌든 결과는 검찰 문제는 은폐되고 ‘여혐’만 남았다. 위 두 가지 사안은 복잡한 현실을 젠더로 환원하거나 젠더 문제처럼 보이게 만드는 데 성공했다. 젠더만 동원된 것이다.

이 난장판을 한 번에 ‘정리’한 이는 윤석열씨 캠프의 대외협력특보를 맡고 있는 김경진 전 의원이다. 그는 윤석열씨의 결혼을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과 동급으로 비교했다. “마크롱 대통령은 배우자가 25세 연상”, “고등학교 선생님과 길게 사귀다가 이혼시키고 본인이 결혼했다”며, 프랑스 사례가 부족했던지 영국도 덧붙였다. “영국 존슨 수상은 두 번째 부인하고 살고 있다가 그사이 다른 분하고 사귀면서 세 번째 결혼했다.” 솔직히 나는 그의 말을 못 알아들었다.

마크롱 대통령은 가부장제 사회에서 연상연하의 기준을 바꾼 경우다. 이성애 사회에서 결혼의 성격은 성매매부터 파트너십까지 다양하지만 동시에 연속선을 이룬다. 자원이 많은 남성을 위주로 나머지 사람들이 배치된다. 남성혐오는 불가능한 개념이지만, 가능하다고 해도 멋진 남자 배우나 좋은 영향력을 행사하는 남성 유명인사에 대한 혐오감을 조직하는 세력은 없다.

남녀의 나이 차이는 여러 가지를 의미한다. 성차별 사회에서는 남성의 매력은 돈과 권력이고, 여성의 매력은 여전히 외모와 젊음으로 간주된다. 매릴린 먼로를 비롯해 여러 차례 결혼 경력이 있는 미국 작가 아서 밀러는 자기보다 55세 연하의 여성과 소개팅을 추진했다. 당시 상대방 여성이 한 말, “맙소사, 아서 밀러가 아직 살아 있단 말이어요?”

윤석열씨와 마크롱의 경우가 같다는 주장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모든 남성이 김경진씨와 같은 의견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비중 있는 인사’가 이런 발언을 할 수 있는 사회 분위기가 놀랍다. 그는 윤석열, 마크롱, 존슨의 결혼이 모두 같다고 생각한다. 다부종사(多夫從事)든 다부종사(多婦從事)든 남녀 모두 여러 번 결혼해도 된다는 자유로운 영혼을 옹호하는 것인지, 반대로 모두 ‘불륜이고 비정상’이니 윤석열씨만 문제 삼지 말라는 주장인지 모르겠다.

여성의 짧은 머리와 김건희씨 비난을 여성혐오라고 보는 것은 환원주의지만, 세 남성의 결혼의 성격이 같다는 주장은 환원주의에도 미달한다. 성차별주의 같은 ‘쉬운 지배 이데올로기’도 실천할 줄 모르는 분별력이 없는 경우다. 말로 인한 화(禍)나 웃음거리를 면하는 방법은 침묵뿐이지만, 침묵 여부 역시 판단 능력이 있어야 가능하다.

* 30회로 ‘정희진의 융합’을 마칩니다. 애독해주신 독자 여러분과 메일과 댓글로 의견을 주신 많은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정희진

여성학 연구자·문학박사. 글쓰기와 책읽기를 좋아한다. ‘논문, 비평, 수필, 편지, 칼럼’ 등 글의 장르는 없다고 생각한다. 여성학 연구자로서 공부의 목적은, 기존의 논쟁 구도와 전선을 이동시키는 것이다. 여성주의와 탈식민주의 관점에서 한국 현대사를 재해석하는 데 관심이 있다. 휴대전화를 사용하지 않는다. tobrazil@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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