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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한겨레 프리즘] ‘국익’으로 포장하지 말라

등록 2021-08-17 18:11수정 2021-08-24 18:27

김경욱ㅣ법조팀장

‘국익’이란 말은 아득하고 몽롱하다. 이 말을 주로 쓰는 정책결정자나 정치인들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내게 이 말은 모호하고 관념적이어서 쉽게 와닿지 않는다. 국익은 ‘나라의 이익’이다. 나라의 사전적 의미는 국민, 영토, 주권을 가진 사회집단이다. 이 말대로라면 국익은 궁극적으로 나, 너, 우리의 이익이어야 한다.

그런데 현실은 어떤가. 역대 대통령들은 정책결정 과정에서 논란을 잠재우기 위해 이 말을 내세웠다. 4대강 사업,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체결, 베트남전·이라크전 파병 등이 대표적이다. 특히 독재와 권위주의 정권은 인권을 유린하고 반대파를 탄압하는 도구로 국익을 내세우기도 했다. 독재와 장기 집권이라는 사적 이익을 국익으로 포장한 이도 있었다.

국익이란 말을 되새긴 것은 지난 13일,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가석방에 대한 문재인 대통령의 입장을 접하고서였다. 이날 문 대통령은 박수현 청와대 국민소통수석을 통해 “국익을 위한 선택으로 받아들인다”고 밝혔다.

그런데 한번 따져보자. 이게 왜 “국익을 위한 선택”인가. 이 부회장의 가석방으로 그동안 주춤했던 삼성의 투자가 활발해지고, 백신 외교에서 이 부회장이 역할을 한다면, 국가적 위기 상황을 돌파할 수 있다는 것이 ‘국익론’의 핵심 논리다. 하지만 청와대의 설명대로 이 부회장의 가석방을 국익과 연결지으면, 재계와 보수언론이 제기해온 이 부회장의 사면 요구를 문 대통령이 받아들이지 않은 것은 오히려 국익에 반하는 일이 된다. 단순히 구금 상태에서 풀려나는 가석방과 달리, 사면을 받게 되면 형의 효력이 상실되거나 형 집행이 면제돼 자유로운 경영 활동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국익론의 근저에 깔린 ‘이 부회장을 석방하면 경제가 살아난다’는 식의 인식도 문제다. 박범계 법무부 장관은 지난 9일 이 부회장의 가석방 결정을 발표하며 “코로나19 장기화에 따른 국가적 경제 상황과 글로벌 경제 환경에 대한 고려 차원”이라고 설명했다. 이 부회장의 가석방을 나라 안팎의 경제 상황과 연결지은 것이다. 이 부회장이 석방돼야 경제 상황이 나아진다면, 거꾸로 그가 수감됐을 때 경제는 죽을 쒀야 한다. 그런데 올 초 그가 법정 구속된 뒤 한국 경제가 줄곧 내리막길을 걸었다거나, 삼성그룹의 주력 계열사 실적이 악화했다는 얘기를 들어본 적이 있는가. 한국 경제나 삼성은 이 부회장 한 사람의 가석방 여부에 따라 희비가 갈릴 만큼 규모가 작거나 허약하지 않다.

국익론의 가장 큰 문제는 경제 효과만 지나치게 강조한다는 점이다. 이 부회장이 정부와 국민 기대에 화합하는 차원에서 대규모 투자를 결정하거나 일자리 만들기에 나선다면, 국익에 도움이 된다는 주장은 국익의 단면만 본 결과다. 국익은 투자금, 일자리 수 등 수치화할 수 있는 양적 측면만 있는 것이 아니다. 질적 측면도 있다. 이번 가석방은 ‘유전무죄’와 ‘법 위의 삼성’을 다시 한번 증명함으로써 ‘모든 국민은 법 앞에 평등하다’는 법치주의의 가치와 사법 정의를 허물어뜨렸다. 이는 수치로 환산할 수 없는 부분이다.

문 대통령이 법무부를 통해 이 부회장을 가석방한 것은 정치적으로 결코 불리할 게 없다는 정무적 판단에 따른 선택으로 보인다. 시민사회단체 등 진보진영이 반발하고 있지만, 이들이 이번 일을 계기로 야당 지지층으로 돌아설 가능성은 희박하다. 반면, 이 부회장 가석방 여론이 높았던 중도층의 지지를 끌어낼 발판을 마련했고, 임기 말 경제 살리기에 노력했다는 명분과 실리도 챙길 수 있게 됐다.

문 대통령은 4년 전 취임식에서 이렇게 말했다. “문재인과 더불어민주당 정부에서 기회는 평등할 것입니다. 과정은 공정할 것입니다. 결과는 정의로울 것입니다.” 이 부회장 입장에선 가석방 기회는 평등했고, 심사 과정은 공정했으며, 결과는 정의로웠을 것이다. 그러나 대다수 국민 입장에서 보면, 이번 가석방은 재벌 특혜에 가깝다. 이를 ‘국익’이라는 말로 포장하지 말라.

das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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