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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떠나거나 죽어야 하는 군대

등록 2021-08-18 15:45수정 2021-08-19 02:37

[숨&결] 배복주 ㅣ 정의당 부대표

지난 5월 공군 이아무개 중사에 이어 해군에서도 성추행 피해 ㄱ 중사가 사망했다. 올해 벌써 두번째 죽음이다. 두분 모두 자신이 일하는 군에서 성추행 피해를 겪고 마지막 선택을 했다. 참담하고 아득한 심정이다. 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군의 폐쇄적 구조와 성차별과 반인권적 조직 문화를 지적하고 이를 개선해야 한다는 의견이 쏟아졌고 그에 따른 대책도 수없이 수립했지만 무용했다.

나는 민간에서 성고충상담관이 군에 진입하기 시작했던 2015년부터 최근까지 매년 성고충상담관들에게 성폭력 사건에 대해 자문을 했었다. 각급 부대에 배치된 성고충상담관은 성폭력 피해자를 상담하고 피해자를 지원하면서 부대 지휘관에게 보고와 지휘 조언을 한다. 자문을 할 때 성고충상담관들이 가장 질문을 많이 하는 것 중 하나가 2차 피해였다.

대다수 성폭력 피해 군인이 강력하게 요구하는 것은 ‘비밀유지’였다. 사례에 대해 자문을 할 때, 성고충상담관들은 피해자의 강력한 비밀유지 요구가 있지만 피해 사실이 심각하거나 반복적인 사례인 경우에 피해자를 보호하고 지원할 방법이 무엇인지에 대해 자문해달라는 요청이 있었다. 이런 경우 피해자가 비밀유지를 원하는 이유가 무엇인가를 질문해야 한다. 피해자는 자신의 피해 사실이 부대에 알려지면 악의적인 소문이 나고 가해자를 옹호하는 주변인들의 괴롭힘이 시작되고 부대 분위기를 망친 사람으로 낙인찍힌다. 이후 다른 부대로 이동하더라도 그 꼬리표는 붙는다. 피해자가 성고충상담관에게 상담하거나 부대의 상사나 지인에게 피해 내용을 말하기까지도 용기가 필요한데, 신고하기까지는 모든 일상의 어려움을 감수하겠다는 각오로 결심을 한다. 결국 2차 피해에 대한 두려움이 가장 중요한 이유다.

다른 범죄보다 성폭력 사건에서 피해자들은 2차 피해에 심각하게 노출된다. 특히 조직이나 집단에서 성폭력 사건이 발생하면 피해자에 대한 원망, 비난, 의심 등을 한다. 조직 내 가해자의 위치와 피해자와의 관계에 따라 그 정도가 강화되기도 한다. 피해자들은 ‘피해자가 유발했다’ ‘피해자가 별일 아닌 일로 예민하게 군다’ ‘상황상 그럴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럴 사람이 아니다’ ‘조직에 공이 많은 사람이니 용서해주라’ 등의 말을 들으면 스스로 자책하고 위축된다. 그래서 2차 피해를 방지하는 것은 피해자 인권을 보장하는 것이다.

해군 ㄱ 중사도 성추행 사건에 대한 비공개를 강력하게 요청했다. 하지만 가해자의 보복과 인사상 불이익 등이 2개월 이상 지속된 상황에서 이를 견딜 수 없어서 사건 신고를 하게 되었고 신고 뒤 사흘 만에 사망했다. (아마도) ㄱ 중사는 군이 원하는 ‘조용한’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지만 군은 이조차도 지켜주지도 못했고 2차 피해가 발생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도 주지 못했다. 결국, 신고하지 않더라도 신고를 하더라도 모든 절차에서 2차 피해 방지나 피해자 보호가 제대로 되지 않을 것이고 가해자 징계나 처벌까지 가야 할 고통스러운 여정을 감당할 수 없다고 판단하지 않았을까?

수년간 성고충상담관들에게 자문할 때마다 접하는 군대 내 성폭력 사건들에서 대다수 피해자가 요구하는 것은 가해자의 진정한 사과와 재발 방지 약속이고 그들은 낙인, 비난, 불이익 없이 다시 군생활을 잘해낼 수 있기를 바랐다. 하지만 대다수 피해자는 그러한 기대가 피해 발생 시기부터 마지막까지 철저하게 무너지는 경험을 한다. 군은 사건이 발생되면 피해자를 회유하고 협박하고 종용하고 설득하면서 사건을 무마시키거나 은폐하려고 한다. 어렵게 징계위원회가 열리거나 수사와 재판이 시작되어도 군의 지휘를 받는 사람들이 징계하고 수사하고 재판한다. 신뢰성도 독립성도 없다. 그래서 피해자는 군조직에 대한 신뢰를 잃게 되고 자신의 일상은 엉망이 되어버린다. 결국 군을 떠나거나 죽을 수밖에 없다.

군의 상황이 이러한데 우리는 남녀공동복무제 같은 대선 공약을 듣고 있다. 우리 군대의 안전과 인권 보장을 먼저 말해야 하는 게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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