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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세상읽기] 어떤 죽음의 배후

등록 2021-08-19 16:58수정 2021-08-20 10:11

지난 6월10일 서울 용산구 국방부 앞에서 열린 이 중사 추모 및 국방부 규탄 기자회견 때 참석자들이 정문에 국화를 꽂고 손팻말을 붙이고 있다. 이종근 선임기자
지난 6월10일 서울 용산구 국방부 앞에서 열린 이 중사 추모 및 국방부 규탄 기자회견 때 참석자들이 정문에 국화를 꽂고 손팻말을 붙이고 있다. 이종근 선임기자

김종대 | 연세대 통일연구원 객원교수

미국의 랜드연구소는 올해 초에 연구보고서를 통해 성폭력과 성희롱으로 인해 일찍 군을 떠나는 군인이 매년 1만6천명이라는 충격적인 사실을 공개했다. 2010년부터 자체 개혁으로 꾸준히 개선되었던 성폭력 관련 사건은 2016년에 이르러 최저 수준으로 안정되었다. 그런데 2018년께부터 반전이 일어났다. 그해 여성 군인을 대상으로 한 성폭력 발생률이 전년에 비해 44% 증가한 1만3천명, 남성 피해자까지 포함하면 2만명에 이른다. 참으로 이상한 일 아닌가. 왜 2018년이라는 특정 시점에 성 관련 사건이 폭증한 것일까? 아마도 2017년부터 ‘미투 운동’이 본격화된 사정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이후로도 군대에서 성폭력 사건이 끊이질 않자 올해 2월에 조 바이든 대통령은 독립적인 검토위원회로 하여금 문제를 진단하고 해결책을 모색하도록 지시했다. 검토위원회는 미국 군대에서 성폭력 사건은 계속 높은 발생 빈도를 나타내는 데 반해 피해자 중 신고를 한 비율은 4명에 1명꼴밖에 안 된다고 지적했다. 신고조차 하지 못하고 대부분의 피해자는 무거운 짐을 지고 군생활을 계속하거나 군을 떠나버린다는 이야기다. 위원회 보고서는 “미국 군대는 자신의 아들과 딸들을 보호하는 데 실패했다”며 좀 더 강력한 책임과 법적 조치를 담은 80여개의 권고안을 로이드 오스틴 국방장관에게 제시했다.

미국의 미투 운동이 한국에 끼친 영향은 실로 대단했다. 그러나 그 충격의 파장이 한국군으로도 불어닥칠 줄 우리 군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최근 연이은 여성 부사관의 비극적인 사망 사건을 계기로 우리 군도 더 이상 성폭력 사건이 남의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이제야 처음으로 깨달은 거다. 요즘 국방부 고위 간부들은 휴대폰 알림 소리만 들려도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 혹시 군에서 또 무슨 사고가 터지지 않았는지, 속보를 보기가 겁난다고 한다. 아직도 우리 군은 이런 사건의 원인을 근원적으로 성찰해본 적이 없고, 재발을 방지하는 방법도 찾지 못했기 때문에 사건이 터지면 당혹감은 더욱 커진다. 최근 공군에 이어 해군에서 일어난 여성 부사관의 안타까운 죽음을 자세하게 들여다보면 군대 내에서 성폭력의 피해자에게 가해지는 지속적인 회유와 압박, 즉 2차 가해가 죽음의 배후라는 심증이 더 강해진다. 이 사건이 초급 간부에게 어떻게 번역될까? “섣불리 신고했다가는 나도 저런 비극의 주인공이 된다”는 침묵과 체념 아니겠는가?

군대는 가해자와 피해자가 영구적으로 분리되기 어려운 폐쇄적 조직이고, 조직 보호를 위한 충성의 논리에 익숙하다. 군에 계속 근무하기를 원하는 피해자는 가해자가 활개 치고 다니는 걸 감수해야 하고, 부대 구성원들은 이를 방치한다. 이 시점에 피해자는 조직이 자기편이 아니라는 사실을 절감한다. 섣불리 신고했다가는 부대원들에 의한 낙인효과에 고통받게 되고 더 나아가 지휘관의 근무평정에 의해 진급이 결정되는 자신의 미래에 걸림돌이 될 수도 있다. 심지어 어떤 피해자는 자신의 피해 사실이 “알려지지 않게 해달라”고 자신을 담당하는 군 상담관에게 통사정하는 기현상도 벌어진다. 여군 부사관이 사망한 시점이 성폭력이 발생한 시점으로부터 한참 지나 자신의 피해를 신고한 몇달 뒤라는 점은 무얼 의미하나? 용기를 내서 침묵을 거부하고 나섰다가 제대로 보호받지 못한 거다. 침묵을 강요했던 조직이 이 죽음의 배후다. 그게 한국의 군대다.

이럴 바에는 사건을 만들지 말고 침묵하거나 조용히 군을 떠나는 초급 간부가 상당할 것이다. 그러나 강요된 침묵이 차곡차곡 쌓이다가 한계 상황을 넘어서는 티핑 포인트가 있다. 갈등이 폭발하는 순간이다. 군 지휘관은 사태를 수습하지 못해 쩔쩔맨다. 여론은 사정없이 국방부를 두들겨 팬다. 지금 국방부는 레프트 훅을 한대 맞은 데 이어 라이트 훅까지 얻어맞고 휘청거리는 형국이다. 도무지 해법을 알지 못하고,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쩔쩔매는 모습도 보기에 민망하다. 군 외부는 물론 내부로부터의 신뢰에도 경고등이 켜졌다. 이 신호를 무시하면 지금 미군의 위기가 한국군에 더 크게 닥칠 수 있다. 두 여성 부사관의 죽음은 그런 파국을 경고하는 신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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