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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뉴노멀-종교] 감정적인 개와 합리적인 꼬리

등록 2021-08-22 11:21수정 2021-08-23 02:08

[뉴노멀-종교]  구형찬 ㅣ 인지종교학자

이슬람 극단주의 무장단체 탈레반이 장악한 아프가니스탄 상황이 불안하다. 탈레반은 전세계 대부분의 무슬림에게 비판을 받는 상황에서도 자신들의 신념을 신의 뜻과 동일시한다. 그들은 도덕 판단의 근거를 이슬람 율법인 ‘샤리아’에서 찾으며, 심지어 인권도 그 아래에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반면, 샤리아의 다른 가치들에는 침묵한다. 결국 부르카를 입지 않았다는 이유로 여성에게 총을 쏘는 일이나, 12살의 어린아이를 탈레반 대원과 강제로 결혼시키는 일도 정당화한다. 탈레반은 ‘정상 국가’를 세우겠다고 선언하고 있지만, 그들이 이끄는 나라에서 살고 싶은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어디서 많이 본 듯하지 않은가? 한국에도 자신들의 신념을 신의 뜻과 동일시하는 일부 종교인들이 있다. 그들 역시 도덕 판단의 근거를 경전에서 찾고 누군가의 인권마저 그 경전 아래에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는 동안 경전의 다른 구절들은 외면된다. 결국 방역지침을 위반하고 행사를 강행하는 일이나, 포괄적 차별금지법을 종교적인 이유로 반대하는 일도 정당하다고 주장한다. 그들이 정교분리와 종교의 자유를 외칠 때면, 국가의 간섭은 거부하지만 정치에는 영향력을 최대한 행사하겠다는 말로 들린다.

그런데 그들은 정말로 종교적 율법이나 경전의 내용을 기준으로 삼아 도덕적으로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걸까? 도덕심리학 분야의 연구에 비추어볼 때 그렇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심리학자 조너선 하이트에 따르면, 도덕 판단은 먼저 직관과 감정이 작용하여 발생한다. 판단의 근거를 추론하고 설명하는 과정은 그 후에 이어진다. 이른바 ‘감정적인 개와 합리적인 꼬리’ 가설이다. 종교적인 도덕 판단이라고 해서 다를 까닭이 없다. 즉, 율법이나 경전은 도덕 판단의 원인으로 작용하기보다는 사후적인 설명의 근거나 핑계로 동원된다.

특별히 이성보다 감정에 많이 휘둘리는 사람들에게만 국한된 일은 아니다. 인지과학자 위고 메르시에와 당 스페르베르는 이성의 가장 핵심적인 역할이 바로 이유를 추론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성의 기능은 특히 자신의 주장을 합리화하거나 남의 의견을 반박할 이유를 찾는 데 최적화되어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자신에게는 관대하고 남에게는 엄격하게 굴게 되는 것도 이성의 작용 탓인지도 모른다. 이러한 이성은 합리적이지 않은 자신의 직관과 믿음을 고집스럽게 우겨서 정보와 상황을 왜곡하고 타인을 곤란에 빠트리는 데 사용될 수도 있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겪는 일이다. 자신의 개인적인 신념을 국민의 뜻과 동일시하면서 상대방을 헐뜯기 좋아하는 정치인들에게서 늘 보게 되는 일이기도 하다. ‘이성적 동물’은 의외로 편협하기 쉽다.

비관적일 필요는 없다. 이성은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는 사람들 간의 협업에서 진정한 힘을 발휘한다. 과학이 그렇다. 과학은 소수 천재의 기여만이 아니라 다수의 협업을 통해 발전해왔다. 과학자는 자기의 연구를 창의적으로 수행하면서 타인의 연구를 엄격하게 평가한다. 물론 과학자도 잘못을 저지른다. 데이터 조작과 왜곡도 종종 발생한다. 그러나 다른 과학자들이 가만히 두고 보지 않는다. 발생한 문제가 누군가의 의도적인 부정이라는 게 밝혀지면 비난을 받고 퇴출당할 것이며, 연구 과정의 오류라면 수정이 요구될 것이다. 높은 수준의 품질 관리가 성립된다. 학창 시절 이후 과학과 담을 쌓고 살게 되더라도 배울 만한 건 배워야 한다.

국내외 상황이 혼란스럽다. 더 나은 의사 결정이 필요한 시기다. 종교와 관련된 문제든 정치와 관련된 문제든 다양한 협업을 통해 해답을 모색해 나가야 한다. 가장 중요한 조건은 자신의 편협성과 한계를 직시하고 인정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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