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도희·최연진 대학원 석·박사 과정(국문학)
내가 일하는 테크 업계에선 요즘 민간 우주 사업이 한창 화제다. 원래 나사(NASA) 로고가 박힌 셔츠를 계절마다 몇개씩 돌려 입고 다니는 나로서는 흔치 않은 덕업일치의 기회라 내 ‘최애’ 스페이스엑스(X)를 월급 받고 모니터링하는 나름 충족한 나날을 보내는 중이다. 이상한 소리 많이 하기로 유명한 일론 머스크가 최고경영자(CEO)인 탓인지 화성으로 사람을 이주시킨다는 스페이스엑스의 목표를 대부분 허무맹랑한 꿈으로 여기는 모양이지만, 의외로 스페이스엑스의 화성왕복선 스타십은 나사가 실현 가능성을 인정하고 아폴로 이후 첫 유인 달탐사 미션인 아르테미스 계획에 가져다 쓰려고 개발비까지 쥐여준 프로젝트다. 이미 10년 가까이 국제우주정거장으로의 화물운송을 맡아온 파트너이기도 한 스페이스엑스에 나사가 보내는 신뢰가 어느 정도냐면, 2차 세계대전부터 지금까지 미국 정부와 의회의 굳건한 지지를 받아온 오랜 파트너 보잉에 로켓 제대로 안 만들면 스페이스엑스로 갈아 치워버리겠다고 상시적으로 협박을 할 정도인데, 스페이스엑스가 궤도용 로켓을 반복 재사용(원래 로켓은 대기권으로 떨어질 때 타버려서 일회용이다)하는 데 성공한 인류 역사상 최초이자 유일한 업체임을 생각하면 사실 놀라운 일도 아니다.
공상과학의 영역으로 여겨졌던 인공지능이니 자율주행이니 하는 기술들도 작년에 왔다가 죽지도 않고 또 나타난 각설이처럼 느껴지는 요즘 시대에 ‘인류 최초’라는 수식이 붙은 과학의 진보를 발견하는 건 흔치 않은 일이다. 내가 스페이스엑스에 마음을 빼앗긴 건 그래서였다. 본래 지식은 인류 전체에 보편적으로 유익하다는 사르트르의 말에 이보다 잘 들어맞는 예도 없지 싶었다. 그러므로 나의 우주 ‘영업’에 대한 반응이 왜 이토록 냉담한가에 대한 의문이 드는 건 나로서는 매우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 물론 가장 간단한 답은 인문학 전공한 사람들에게 로켓의 감속 제어에 대한 영상을 한글 자막 없이 보냈기 때문이라는 것이겠지만, 이건 조금 더 근본적인 질문이기도 하다. 지금까지 지구에서 숨 쉬었던 모든 존재가 공유하는 단 하나의 경계, 그 경계를 넘는 일이 왜 이제는 한때 아폴로11이 그랬듯 온 인류가 한마음으로 둘러앉아 감동을 공유하는 뜨거운 기억일 수 없게 된 것일까. 생각해보면 이 의문 또한 답은 간단하다. 아폴로11 역시 한번도 ‘인류의 승리’인 적이 없었다는 것이다. 서방세계의 승리이자, 앞서기 위해선 돈은 물론 사람 목숨도 우습게 갈아 넣었던(당시 나사가 계산한 아폴로 승무원들의 무사귀환 확률은 5%에 불과했다) 냉전시기에 대한 선택적 망각의 산물이지.
그럼에도 그 승리가 인류 공통의 것으로 기억될 수 있었던 건 그 ‘인류’의 범주에서 배제된 자들이 목소리를 전할 길이 없거나 미약했던 탓일 뿐이다. 지금은 다르다. 나는 스타십이 달을 밟는 날을 손꼽아 기다리겠지만, 누군가는 의료보험이나 공교육, 기후위기에 쓸 돈은 없으면서 달에 정기항로 같은 걸 놓을 돈은 있었던 미국 정부에 분노할 것이고, 누군가는 지구 대신 우주를 정복하려는 제국주의를 비웃을 것이며 그 모두는 청중을 얻을 것이다. 그리고 이 위대하다면 위대한 과학의 진보가 주는 영감을 더 많은 사람들의 것으로 만들고, 다음 시대로 이어갈 수 있도록 완성하는 것은 박수갈채 소리를 흐리는 반대자들의 끈질긴 ‘잡음’, 정당한 분열이다. 실제로 예산에 대한 시민들의 분노는 나사가 로켓 개발과 운영을 민간에 이양하고 민간에선 하지 않을 순수과학 연구에 집중하는 쪽으로 움직이게 만들었고, 스페이스엑스와의 협업은 그 결과물이다. 나 역시 스페이스엑스가 더 이상 화성의 식민화라는 목적을 내세우지 않는다면 훨씬 기쁜 마음으로 그들의 성과를 지켜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뜨거운 집단기억을 공유하던 과거를 ‘좋았던 시절’로 회고하길 즐기는 이들의 생각과 달리, 그들이 내가 살고 있는 시대, 내 세대를 규정하는 데 사용하는 분열과 대립은 사실 꽤 좋은 일이다. 비록 조금은 피곤하고, 영업에 실패한 나의 덕질은 외로울지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