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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유레카] 박범계의 ’궤변’ / 곽정수

등록 2021-08-25 15:01수정 2021-08-25 18:40

중국 춘추전국시대에 명가(名家)라는 학파는 교묘한 ‘궤변(詭辯)’으로 유명했다. 명가의 학자 공손룡의 ‘백마비마론(白馬非馬論)’이 전해진다. 그는 여러 가지 색깔을 사람들에게 보여 준 뒤 흰색은 색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이면 “자, 여러분의 말대로 흰색은 색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흰말은 말이라 할 수가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궤변은 “이치에 맞지 않는 말을 둘러대 논리를 합리화시키려는 허위의 변론”을 뜻한다.(나무위키) 어떤 사람이 남의 소를 훔쳐갔다. 관가에서 왜 남의 소를 훔쳤느냐고 추궁했다. 그는 “제가 길을 가는데 길에 웬 쓸 만한 노끈이 떨어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노끈을 주워서 집으로 간 것뿐입니다”라고 변명했다. 궤변이 아닐 수 없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가석방에 이어 경영 복귀를 둘러싸고 논란이 거센 가운데 박범계 법무부 장관이 “무보수·비상근·미등기 임원 상태로 경영에 참여하는 것은 취업제한 위반이 아니다”고 주장해 파문이 일고 있다. 참여연대·경제개혁연대·경실련은 일제히 “법 취지를 왜곡한 궤변”이라고 비판했다.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은 5억원 이상 횡령·배임 등을 저지르면 5년간 관련 기업의 취업을 제한한다. “범죄행위와 밀접한 관련을 가지는 기업체에서 영향력이나 집행력을 행사·향유할 수 없도록 해서 기업체를 보호하고 건전한 경제질서를 확립하려는 것이다.”(올해 2월 서울행정법원의 박찬구 금호석유화학 회장 취업불승인 취소청구소송 원고 패소 판결) 법무부는 등기이사인 박 회장과 미등기이사인 이 부회장의 사례는 다르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재벌 총수가 경영하는데 보수·상근·등기 여부 같은 형식이 크게 중요하지 않다는 것은 상식이다. 고 이건희 삼성 회장은 33년간 총수로 있으면서 정상적인 출근은 거의 하지 않고 서울 한남동 자택(승지원)에서 보고를 받았다. 신세계의 정용진 부회장처럼 등기이사도 아닌데 경영권을 행사하는 재벌 총수도 여럿 있다. 이재용 부회장도 재판 도중에 급여를 포기하고, 등기임원직도 내려놓았다. 그렇다고 이들이 회사 일을 안 했다고 말할 사람이 한명이라도 있을까?

이 부회장은 출소 뒤 서울 서초동 삼성 사옥으로 직행해서 계열사 사장단을 만나 경영 현안을 보고받았다. 삼성전자가 24일 향후 3년간 240조원 투자, 4만명 고용 계획을 발표하자, 언론은 일제히 “이재용의 결단” “돌아온 이재용”이라고 대서특필했다. 박 장관의 말이 맞다면, 이 부회장은 경영에 복귀해서 회사 의사결정을 주도하는데도, 취업은 아닌 해괴한 상태가 된다. 상식에 반하고, 국민을 우롱하는 궤변이라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차라리 나라 경제와 기업을 위해 특혜를 주는 것이니, 선거에서 표로 심판해달라고 솔직히 털어놓는 게 떳떳할 것 같다.

이 부회장 자신이 취업제한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면 차라리 이해할 수 있다. 또 합법-불법의 이분법적 접근보다 고도의 정치적 판단이 필요한 정치인이라면 사정이 다를 수 있다. 하지만 법무부 장관은 국민에게 공정히 법을 집행해서 ‘법 앞의 평등’이라는 원칙을 바로 세울 막중한 책임이 있는 자리다. “법질서를 훼손하는 법무부 장관은 사퇴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는 게 지나치지 않다.

박 장관이 가석방에 이어 취업제한 면제 특혜까지 주며 당당히 궤변을 늘어놓은 것은 임명권자인 문재인 대통령의 용인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이번 사안을 문재인 정부 말기의 ‘개혁 후퇴’라는 보다 큰 그림 속에서 봐야 할 이유다. 그런 조짐은 진작부터 있었다. 지난 3~4월 청와대의 정책실장, 경제수석 등 핵심 경제라인이 관료 출신에 의해 장악됐다. 8월 초에는 금융감독기구 수장들이 모두 모피아(금융 관료) 출신으로 채워졌다. 이런 일들이 우연일 수 없다.

문 대통령은 참여정부의 개혁 실패 요인으로 ‘관료에 의한 포획’을 꼽으며, 집권하면 결코 그런 일이 없을 것이라고 강조한 바 있다. 관료는 생리적으로 현상 유지 성향이 강하고 개혁에는 수동적이거나 부정적이다. 6년 전 박근혜 정부가 재벌 총수를 가석방하려 할 때는 “경제정의에 반한다”며 비판했다. “(공정과 정의를 내세운) 문재인 너마저…”라는 탄식이 흘러 나온다.

곽정수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선임기자 jskwa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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