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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세상읽기] ‘예술을 품은 교육’으로 새판을

등록 2021-08-25 15:39수정 2021-08-26 02:38

이병곤|제천간디학교 교장

2년 전에 ‘재즈를 품은 사회’(재품사)라는 과목을 개설해봤다. 학생 15명이 신청해서 들었다. 이 수업 준비물은 재즈 음악 파일, 세계지도, 음질 좋은 대형 스피커, 축음기, 여러 종류의 엘피와 콤팩트디스크 음반들이다.

오해 마시라. 나는 음악, 역사, 사회 교사 가운데 어느 쪽도 아니다. 20여년 정도 재즈를 꾸준히 들었을 뿐이다. 재즈의 발생지인 뉴올리언스(미국)만 주목해도 다인종 지역사회, 노예무역, 다양한 민족음악의 혼성과 같은 주제로 100여년 전 역사 이야기를 끄집어낼 수 있다. 게다가 북부 시카고 지역으로의 흑인 노동력 대이동 사건, 미국의 2차 세계대전 참전 등을 재즈의 새로운 형식 발생과 연결 지을 수도 있다.

물론 이 수업의 핵심은 다양한 형태의 재즈를 직접 듣는 것이다. 춤추기 좋고 듣기 편한 스윙 재즈에서부터 형식을 완전히 파괴한 1960년대의 프리 재즈까지 다채롭게 듣다 보면 아이들은 하나의 음악 장르를 입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음악 형태의 역사는 당대 사회와 호흡하면서 형성된다. 오페라는 19세기 귀족 사회에서 유행했던 대형 블록버스터 공연 기획이었다. 에디슨이 맹인을 위한 원통형 오디오북 발명을 시도하지 않았다면 테너 엔리코 카루소가 1902년에 녹음한 ‘남몰래 흐르는 눈물’은 우리에게 전해지지 않았을 것이다. 원통형 소리 저장 장치를 도넛 모양으로 평평하게 펴서 만든 것이 축음기 음반의 탄생이었으니까 말이다.

통합 수업의 핵심 열쇳말은 ‘연결’이다. 음악 작품, 작곡가, 연주가, 당대의 사회, 곡의 감상, 서로의 느낌 나누기, 역사적 배경, 우리가 현재 듣고 있는 음악과의 관련성을 지속적으로 연결한다. 아이들은 앉거나 기대거나 장판 깔린 교실 바닥에 엎드려 있지만 졸지 않는다. 한번의 수업에서 들려줄 수 있는 곡은 한정되어 있다. 그렇기에 사실들의 ‘연결’을 통해 아이들의 음악적 호기심을 ‘자극’하고, 교실 밖에서도 홀로 낯선 장르에 도전하여 들을 수 있도록 안내하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진보주의 교육사상가 존 듀이는 “미적인 경험 안에서는 지적인 것과 실용적인 것이 융합된다”고 했다. 그렇다. 예술작품이 전해준 감동이 내 몸 안에서 전율할 때 우리는 완전하고 통합된 존재를 감지한다. 실체를 알 수 없는 그것을 규명해보려고 여러 설명 체계를 탐색한다. 심미적 경험이 배움을 매개하면서 학습자를 새로운 존재로 변모하게 만든다.

우리 학생들에게 강의할 기회가 주어질 때마다 나는 현대미술의 여러 사례를 적절히 활용한다. 시각예술이란 모름지기 ‘캔버스 위에 정밀하게 묘사한 유화’라는 고정관념만 버리면 드넓은 신세계가 펼쳐짐을 환기하는 것이다.

“리처드 롱이라는 예술가 할아버지가 계셔. 이분은 평생 ‘대지예술’이란 분야를 개척했거든. 대지, 즉 땅 예술을 말해. 좀 낯설지?” 이렇게 이야기를 풀어간다. 리처드 롱은 잉글랜드 곳곳의 자연 속을 걸어 다닐 때 느꼈던 자신만의 고유한 느낌과 경험, 그 자체가 예술작품이라고 말한다. 그 어떤 자산가라도 롱의 작품을 구매, 소유, 대여, 판매할 수 없다. 십수년 전 나는 리처드 롱의 회고전을 런던 테이트 모던 미술관에서 관람한 적이 있다. 그의 작품은 단순하고, 명징했다. 자연 속 돌을 움직여서 만든 거대한 원형 모양의 사진, 자신이 걸었던 경로의 도시 이름, 종이 지도에 표시된 자신의 이동 경로 같은 것들로 구성됐다. 예술은 작품이라기보다 ‘개념’과 더 밀접한 연관을 가지게 됐다.

듀이의 이론을 참조하고, 바탕으로 삼아 예술을 교육과정의 중심에 두면서 지성, 전인, 민주주의를 가르쳤던 대안대학이 미국 남부 노스캐롤라이나 지역에 있었다. 1933~57년 사이에 운영됐던 ‘블랙마운틴 칼리지’가 그것이다. 이 대학은 지역사회가 필요한 가구를 제작하고, 자신들이 필요한 강의동을 설계 시공했으며, 군복무 센터와 병원 환자들을 위한 연극, 음악 프로그램 무대를 디자인하고 설치했다. 삶과 작품, 배움, 깨달음이 함께하는 현장이었던 셈이다.

마르셀 뒤샹의 ‘변기’가 현대미술의 판을 바꿨듯이 기후위기 시대를 겪고 있는 우리에게 1967년부터 시작된 리처드 롱의 작품 제작 방식은 예술에 대한 개념과 접근 방식을 또 다른 차원에서 완전히 달리할 것을 요청하고 있는지 모른다. ‘예술을 품은 교육’이 배움의 여러 요소를 연결하고, 통합하는 새로운 시대를 꿈꿔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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