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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세상읽기] 저금리의 비용

등록 2021-08-31 18:36수정 2021-09-01 02:38

이원재 │ LAB2050 대표

최근 있었던 서울 디에이치자이개포 아파트 청약 추가모집 경쟁률은 3만 대 1이었다. 분양가 15억원가량을 구할 수 있으면 바로 시세 30억여원의 아파트를 구할 수 있는 도박장이었다. 게다가 원금을 날릴 위험이 없는 안전한 도박장이다. 운이 좋아 당첨되는 즉시 거액의 차익을 얻을 수 있는 이 판에 15만명이 몰려들어 다섯채밖에 나오지 않은 잔여 물량을 노렸다.

물론 이 도박장에는 입장료 15억원이 있다. 현금을 가진 사람이라면 당연히 자격이 되지만, 빌릴 수만 있어도 자격은 충분했다.

디에이치자이개포는 극단적인 사례지만, 지금 우리나라 부동산 시장 전체를 봐도 양상은 크게 다르지 않다. 곳곳에 열리는 일확천금의 부동산 복권을 뽑을 자격은, 얼마나 빌릴 수 있느냐가 결정한다. 현금을 잔뜩 쌓아두고 있는 부자가 아니라면 말이다. 게다가 저금리 시대다. 돈을 빌리는 데는 거의 비용이 들지 않는다.

사실 저금리 시대는 놀라운 약속처럼 들린다. 누구든지 돈을 빌려서 사업할 수도, 투자할 수도 있다. 이자는 거의 내지 않아도 된다. 성공해서 나중에 갚으면 그만이라고 하지만 계속 연장하면서 원금은 갚지 않는 방법도 있다. 무한한 기회를 열어주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함정이 있다. 빚낼 기회는 불균등하다. 부동산 같은 재산이 있는 사람은 돈을 쉽게 빌린다. 재산이 없다면 빚내기도 어렵다.

숫자로 이미 나와 있다. 랩(LAB)2050이 구축한 ‘한국 부동산 계층 디비(DB)’를 보면, 2020년 3월 현재 부동산 자산 상위 2% 가구는 연간소득 수준도 다른 계층보다 월등히 높았지만, 그 소득의 세배 이상을 빚으로 내어 자산을 불린 상태였다. 부동산 자산 중간계층과 하위계층의 빚은 연간소득보다 작았다. 소득 계층이 높을수록 부채 비율이 높기도 했다.

빚이 소득에 비례할 수는 있겠다. 갚을 능력을 따져야 하니 말이다. 그런데 소득이 많은 사람들이 소득 대비 부채의 비율도 높은 이유는 무엇일까? 이제 생활비 조달을 위해서보다 자산 구매를 위해 빚을 얻는 일이 많아져서 그렇다. 자산 구매자는 주로 소득과 자산이 원래 많은 사람들이다. 그러니 이들이 빚을 낼 기회도 많아진다.

빚낼 기회는 직장의 성격에 따라서도 불균등하다. 정부나 공공기관이나 대기업이나 대형 금융사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돈을 쉽게 빌린다. 중소기업이나 스타트업, 비영리기관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빌리기가 쉽지 않다.

이런 이유 탓에 우리나라에서 소득 상위 20% 가구가 빌린 돈은 소득 하위 20%가 빌린 돈의 열배나 된다.

저금리 시대에 이런 현상은 더 심해진다. 저금리는 가계부채 급증을 부추기고 있다. 가계부채 급증은, 소득 격차를 자산 격차로 확대 전환하고 있다. 소득은 흘러가지만 자산은 남는다. 자산 격차는 대물림되며 사회격차 구조를 고착시키고 확대한다.

한국은행 금융통화위원회가 기준금리를 인상했다. 시중 대출금리는 이미 오르기 시작했다.

금리인상에 대해 논란도 많다. 생활비가 모자란 취약계층에게 부담이 간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소득이 높을수록 빚이 많다. 또한 빚을 갚기 어려운 취약계층을 위한다면, 저금리 대출보다 복지 지출을 확대해야 한다.

대출받아 사업하고 있는 자영업자들이 어려워진다는 지적도 나온다. 그러나 실상은 자영업자 중에도 소득 상위층이 더 많은 빚을 내고 있다. 영세자영업자들에게 고통스러운 것은 이자보다는 말라가는 수요와 높은 임대료다.

금리인상이 대출받아 집을 사려는 청년들의 사다리를 걷어차는 일이라는 비판도 나온다. 그러나 20대, 30대 대출도 소득이 가장 높은 최상위 계층에게 몰려 있다. 안정적인 소득과 자산을 모두 확보한 층이 대출까지 받아 앞으로 격차를 더 늘릴 가능성이 있다.

과거에 빚은 하위계층이 자산을 확보해 중산층으로 이동하는 사다리 구실을 했다. 그러나 서울 아파트값을 중심으로 고가 부동산이 주로 오르는 최근 몇년 동안, 빚은 상위계층이 자산을 더 크게 불리도록 도우면서 계층이동 사다리를 걷어내는 구실을 했다.

금리 상승의 결과로 발생하는 비용은 누가 내게 될까? 빚낼 기회를 가졌던 상위층이 주로 낼 것이다. 반면 저금리의 비용은 그런 기회를 갖지 못한 중간층 이하가, 그리고 사다리가 사라진 사회에 살게 될 우리 아이들이 부담할 것이다. 돌이킬 수 없는 시점이 되기 전에, 되돌려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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