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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국회 보도 클리셰들의 폐해

등록 2021-09-02 17:59수정 2021-09-03 02:38

구글 등 애플리케이션(앱) 마켓 사업자가 특정 결제 수단을 강제하지 못하도록 하는 일명 \'구글 갑질 방지법\'이 31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본회의에서 통과되고 있다. 연합뉴스
구글 등 애플리케이션(앱) 마켓 사업자가 특정 결제 수단을 강제하지 못하도록 하는 일명 \'구글 갑질 방지법\'이 31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본회의에서 통과되고 있다. 연합뉴스

[세상읽기] 서복경|더가능연구소 대표

하는 일 때문에 19년째 국회의 사계절을 들여다보면서 살고 있다. 그러다 보니 ‘이맘때면 이런 종류의 국회 보도가 나올 때가 되었다’는 감각이 자동입력 프로그램처럼 돌아간다. 때가 되면 늘 나오는 진부한 소재, 식상한 표현에 변하지 않는 결론들이 있다. 이런 클리셰들은 그저 식상한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심각한 부작용을 만들어낸다.

총선이 있는 4월이나 원 구성을 새로 하는 해 6월이면 늘 나오는, 임기만료 폐기 법안이나 계류 법안에 관한 보도는 그중 하나다. 임기만료 폐기 법안이란 접수된 법안 가운데 해당 대수 국회가 본회의 의결 등 처리 절차를 완료하지 못해 폐기되는 법안을 말한다. “00대 국회도 법안 무더기 폐기” 같은 제목으로 쏟아지는 보도는 마치 국회의원들이 ‘월급 받으면서 일은 안 하고 놀았다’는 이미지를 반복해서 재생산한다. 그런데 우리나라 국회가 접수 법안을 모두 법으로 만들면 그거야말로 큰일이다. 접수 법안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접수 법안 대비 통과 법안의 효율성으로만 따지자면 대한민국 국회는 벌써 오래전부터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입국 중 1위였다. 하지만 국회가 법을 ‘더 많이’ 만든다고 해서 국민의 삶이 나아지는 건 아니다. 이런 기사를 매년 반복하는 언론사들은 지난 수십년간 법안 통과율 10%를 한번도 넘지 못했던 미국 의회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할까 궁금하다. 법안을 ‘많이’ 만드는 게 아니라 하나를 만들더라도 ‘잘’ 만드는 게 중요한 시대다. 이런 종류의 보도는 ‘많이, 더 많이’라는 잘못된 기준을 제시하고, 국회는 비난을 피하기 위해 질이 아니라 양적 목표를 추구하는 악순환이 반복된다.

매년 8~9월에 쏟아지는 예산안 관련 클리셰 보도들의 폐해도 심각하다. 정부는 8월에 국무회의 심의를 거쳐 9월 초 예산안을 국회에 제출한다. 이맘때 늘 등장하는 보도 중 한 유형은 “역대급 슈퍼예산” 등의 제목을 단다. 지금까지 우리나라 국가 경제는 경제위기가 발생한 몇몇 해를 제외하면 늘 성장해왔다. 국가 경제가 성장하고 1인당 소득과 자산이 증가하면, 조세제도의 별 변화 없이도 세수는 증가한다. 국가 재정은 걷는 만큼 써야 한다. 세금을 걷어 국민을 위해 쓰지 않고 흑자를 내는 건 정부의 직무유기다. 매년 예산은 전년도보다 늘어날 수밖에 없고, 매년 ‘역대급 예산’이 편성되는 건 자연스럽다.

그런데 ‘역대급’ 보도와 ‘빚더미’ 보도가 짝을 이루면 모양이 좀 달라진다. 국가 채무 증가 추이 혹은 총 채무 규모가 심각하다는 것이다. 이 둘을 엮으면 ‘국가 빚이 늘어나는데 예산을 더 많이 편성했다’는 논리가 나온다. 그러나 이 둘은 별개의 영역이다. 당해연도 세수를 기반으로 세출 예산을 잡는 것과 중장기 국가 채무를 같은 반열에 놓는 것부터 이상한 일이다. 이런 종류의 기사들은 늘 “OECD 국가들과 비교할 때 국가 채무 수준은 양호한 편이지만”이라는 단서를 달면서도 “우려스럽다”고 말해왔다. 그렇다. 오이시디 국가 평균이나 우리나라 이상의 경제 규모를 갖는 국가들과 비교할 때도, 우리나라 국가 채무 수준은 무척이나 ‘양호’했고 지금도 ‘양호’하다.

코로나19가 발생한 이후에도 그렇다. 이런 현실을 의식해서인지 올해 예산안 보도에서는 “‘코로나19’로 확장재정을 편성해야 하기는 하지만”이라는 단서도 달렸다. 그래도 결론은 똑같다. 여기에 다시 ‘라면’ 보도가 더해진다. “채무증가율이 이대로라면 0000년도에는 국민 1인당 채무가 0000이다”라는 논리 구조다. 이런 보도는 그 기간에 발생할 수 있는 수많은 변수를 누락한 채 채무액만을 기준으로 시민들의 위기의식을 자극한다.

문제는 이런 보도들이 국회의 예산심의를 ‘깎기 경쟁’으로 몰고, 예산심의 과정에서 기획재정부의 권한을 절대화한다는 점이다. 국회가 예산심의 과정에서 비목을 추가하거나 증액을 하려면 정부의 동의가 있어야 한다. 그런데 보건복지부나 환경부, 노동부 등의 동의가 있어도 칼자루는 기재부가 쥐고 있다. 기재부가 동의하지 않으면 증액이 불가능한 것이다. 국회 예산심의의 기준은 기재부가 임의로 그어놓은 가이드라인이 아니라 5천만의 삶이어야 한다. 더군다나 지금은 전세계 선진국들이 모두 전례 없는 확장재정 정책을 쓰고 있는 ‘코로나19’ 시대다. 2021년 예산심의를 하는 국회의원들의 건투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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