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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이슬람이 문제인가

등록 2021-09-13 17:56수정 2021-09-14 02:34

[세상읽기] 한승훈ㅣ종교학자·원광대 동북아시아인문사회연구소

“모든 종교는 평화를 말한다. 그런데 왜 종교 때문에 테러, 전쟁, 학살이 끊임없이 일어나는가?” 이제는 이런 순진한 질문조차 무색해지는 시절이다. 아프가니스탄을 장악한 탈레반은 극히 원리주의적으로 해석된 샤리아(이슬람 율법)를 바탕으로 억압적이고 폭력적인 체제를 재건하고 있다. 한편 이슬람국가 호라산(IS-K)은 탈레반이 철수하는 미군과 피란민들에게 지나치게 관대하게 군다는 구실로 카불 공항에 자살 폭탄 테러를 가했다. 이들 또한 다른 모든 종교 및 이슬람 내의 다른 분파들에 대해 전쟁을 선포한 집단이다.

문제는 이슬람인가? 이슬람의 교리 속에 성차별과 전쟁과 테러가 내장되어 있어서 신자들을 폭력적으로 만드는 것인가? 탈레반과 마찬가지로 이슬람을 믿는 아프간 난민을 수용하면 한국에도 테러가 일어나는 것인가? 전세계 인구의 4분의 1 가까이가 무슬림이라는데, 이쯤 되면 국제사회가 뭔가 대책을 세워야 하는 거 아닌가?

물론 이런 식의 이슬람 혐오는 비합리적일뿐더러 문제를 제대로 파악할 수 없게 한다. 그러나 폭력이 이슬람의 본질적 요소가 아니며, 테러나 학살은 ‘일부’ 광신도들의 일탈 행위라는 식의 뻔한 얘기를 하려는 게 아니다. 예컨대 ‘이슬람’은 애초에 ‘평화’라는 의미이며, ‘지하드’는 본래 성전이 아니라 ‘신앙을 위한 분투’라는 의미였다는 식의 변론은 정말이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 모든 변질과 남용에서 벗어난 순수한 종교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했던 적도 없다.

우리는 흔히 종교와 교리를 동일시한다. 그 교리란 흔히 종교 창시자의 원초적 가르침에서 직접 이어진다고 이해된다. 그리스도교가 사랑과 구원의 종교라거나, 불교가 자비와 깨달음의 종교라거나, 유대교가 율법과 선민사상의 종교라고 하는 식의 단편적인 인식들이 여기서 나온다. 그러나 종교의 역사에서 실제로 일어나는 일은 경전 해석을 둘러싼 이견과 논쟁, 정치경제적 이해관계와 긴밀히 결부된 분파들 사이의 투쟁, 전파된 종교와 현지 문화 사이의 갈등과 토착화, 국가 등 다른 정치체들과 종교 조직 사이의 충돌 및 타협 등과 같은 복잡하고 다층적인 문제들이다.

이슬람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경전인 꾸란(코란)에서 테러리즘의 근거를 찾으려는 노력은 대개 실패로 끝난다. 성스러운 전쟁으로서의 지하드 개념은 꾸란의 앗타우바 장을 비롯한 몇몇 구절에서 보이지만, 히브리성서(구약성경)의 여호수아기에 보이는 가나안 정복 전쟁의 잔혹한 학살에 비할 바는 아니다. 문제는 이런 단편적인 구절들(회개하지 않는 불신자에게 맞서는 투쟁, 성스러운 전쟁에서의 순교에 대한 강조)이 훗날 정치지도자들과 테러리스트들에 의해 자신들의 행위를 올바르고 신성한 것으로 만드는 데 이용되었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보면 본질적으로 폭력적인 종교가 있는 게 아니다. 대신, 종교는 어떤 폭력이든 정당화할 수 있다.

9·11 테러 정국에 발간된 브루스 링컨의 <거룩한 테러>(김윤성 옮김, 돌베개, 2005)는 이 문제를 전면적으로 다루고 있다. 먼저 링컨은 비행기 납치범들에게 내려진 알카에다의 지령서를 분석해 이 테러 과정 전체가 의례, 기도, 경전 낭송 등과 결합된 신성한 행위로 포장되고 있었음을 밝힌다. 테러 개시 전에는 면도하고, 몸을 씻는 등의 ‘정화의례’가 이루어진다. 모든 단계마다 기도와 묵상이 이어진다. 피해자들은 제사의 ‘희생제물’처럼 살해당한다. 신에 대한 기도와 경전 암송, 정화의례 등은 각각 그 자체만으로는 전혀 폭력적이지 않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특정한 방식으로 결합되자 대단히 종교적이며 폭력적인 ‘테러 의례’가 완성되었다.

나아가 링컨은 그런 폭력의 신성화가 테러리스트 쪽에서만 일어난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는 오사마 빈 라덴과 조지 W. 부시의 연설을 비교하며 두 사람이 전쟁을 선동하는 종교적 담론의 구조가 거울처럼 닮았다고 주장한다. 게다가 테러와의 전쟁을 지지한 근본주의 개신교인의 세계관은 이슬람 원리주의 테러리스트의 그것과 많은 점에서 일치한다. 아, 사소한 차이가 있다. 한쪽은 그리스도인이고, 다른 한쪽은 무슬림이다.

그런 점에서 아프간 난민을 수용하는 정도의 일로 우리 사회에 위험이 커질 거라고 믿는 것은 망상이다. 사실 한국 사회에는 그럴 만한 능력만 있다면 “순교를 각오하고” 나라를 뒤집어엎을 것이라 공언하고 다니는 훨씬 과격하고 대규모인 종교집단이 있으니 말이다. 공공의 관리와 감시가 시급한 것은 그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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