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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어느 42살 배달 라이더의 죽음

등록 2021-09-14 18:35수정 2021-09-15 02:33

지난 1일 오후 서울 시내에서 배달 라이더들이 오토바이를 타고 이동하고 있다. 연합뉴스
지난 1일 오후 서울 시내에서 배달 라이더들이 오토바이를 타고 이동하고 있다. 연합뉴스

[한겨레 프리즘] 이재훈ㅣ사회정책팀장

그날 오후부터 여기저기 영상이 올라왔다. 8월26일 오전 11시30분께, 42살 배달의민족 라이더 ㄱ씨가 서울 선릉역네거리에서 신호를 기다리다 뒤에서 출발한 23톤 화물차에 깔려 숨졌다. 이 장면은 여러 각도의 블랙박스에 담겨 전시됐다. 배달 시간에 쫓긴 ㄱ씨가 화물차 앞에 들어와 섰는데, 높은 운전석에 앉은 화물차 운전자가 이 장면을 보지 못하고 출발했다. 그렇게 하나의 생명이 끔찍하게 짓이겨졌는데, 인터넷 커뮤니티와 에스엔에스(SNS)의 압도적 반응은 “그러게 왜 불법 끼어들기를 했냐”는 책망이었다. 곧이어 배달 라이더 때문에 겪은 아찔했던 운전 경험을 털어놓는 말, 전문적인 식견을 늘어놓으며 교통사고 과실책임을 따지는 말이 쏟아졌다. 그들에게 ㄱ씨의 죽음은 ‘나에게 있을 법한 일’이 아니었다.

ㄱ씨는 지난 3월부터 배달 라이더로 일하기 시작했다. 코로나19의 장기화로 다니던 직장이 문을 닫아 배달 라이더가 된 무수히 많은 사람들 가운데 한명이다. 통계청 자료를 보면, 지난해 하반기 음식 배달원과 택배기사 등이 포함된 배달원 취업자 수는 39만명으로 코로나19 이전인 2019년 하반기 34만9천명보다 11.8% 늘었다. 올해는 그 수가 더 늘었을 것이다. 감염병 재난으로 인해 벌이가 끊긴 이들에게 배달 라이더는 장벽이 낮아 진입하기 쉽고, 그만큼 일상이 회복되면 원래 직업으로 돌아가기도 쉬울 거라고 여겨지는 일이다.

배달 라이더들이 거리에 쏟아지자 운전자들을 중심으로 이들을 멸시하는 표현이 등장했다. 요즘 인터넷 커뮤니티와 에스엔에스에서는 배달 라이더들을 ‘딸배’라고 부른다. 심지어 신호 위반이나 과속 주행, 번호판 위조 등 배달 라이더들의 범법 행위를 블랙박스나 휴대전화로 촬영해 보이는 족족 신고하는 자경단까지 등장했다. 이들은 ‘딸배 사냥꾼’이라고 불린다. ‘딸배 사냥꾼’들은 ‘검거 실적’을 인터넷에 과시하고, 누리꾼들은 이들을 ‘의인’으로 칭송한다.

배달 라이더들의 무리한 주행은 단속만 한다고 해서 풀릴 문제가 아니다. 대부분의 배달 라이더가 무리한 주행을 할 수밖에 없는 건 교통 상황과 관계없이 인공지능이 지정하는 배달 시간 안에 도착해야 하기 때문이다. 인공지능은 지도 위에 직선거리를 그려놓고 배달을 명령한다. 실제로는 빌딩 사이를 돌아서 달려야 하는 거리다. 그런데도 인공지능은 배달 라이더들이 빠른 속도로 배달하면 할수록 그 속도를 데이터로 축적해 다음 배달 라이더에게 더 빠른 속도를 요구한다. 이런 상황에서 배달 라이더들은 배달 플랫폼이 기준 미달이라며 배달 앱 접속을 차단할까 두려워하며 강박적으로 오토바이를 몬다. 기준이 무엇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국가는 이런 구조를 외면한 채 ‘딸배 사냥꾼’들의 검거 활동을 정식으로 승인하고 나섰다. 국토교통부와 한국교통안전공단은 지난해 5월부터 3천명 규모의 ‘이륜차 교통안전 공익제보단’을 운영하고 있다. 이륜차 운전자 경고 1건당 3천원, 과태료와 범칙금 1건당 5천원 등의 포상금을 지급한다. 지난 6월에는 규모를 5천명으로 늘렸다. 국가가 정말 배달 라이더들의 안전을 걱정했다면, 먼저 단속해야 했던 건 인공지능을 운영하는 배달 플랫폼이다.

이 모든 과정이 ㄱ씨의 죽음을 두고 “그러게 왜 불법 끼어들기를 했느냐”는 책망이 나온 배경이다. 짓이겨진 죽음 앞에 이 죽음의 재발을 어떻게 막을 것인가 고민하는 사회는 사라지고 그저 내가 손해 보는 일만 생기지 않으면 된다고 생각하는 이들만 덩그러니 남은 지독한 풍경. 이 풍경 속에서 플랫폼이 강요하고 재난이 떠밀어내며 국가가 방치한 배달 라이더들의 무리한 주행은 어떤 ‘비정상적인 개인’들의 일탈 행위로 규정되어 ‘정상적인 시민’들이 단속해야 할 대상이 되고 말았다. 배달 라이더들을 동료 시민으로 생각한다면 그들을 멸칭으로 부를 일도, 단속에 환호할 일도 없었을 것이다. 이런 사회 없는 사회가 감염병보다 더 큰 재난 아닐까.

na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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