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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우리 생애 마지막 707일

등록 2021-09-15 16:17수정 2021-09-16 02:32

<돌봄선언>은 ‘돌봄’이 삶의 모든 수준에서 우선시되며 중심에 놓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서울 한 요양원에서 어르신들이 물리치료를 받고 있다. 백소아 기자 thanks@hani.co.kr
<돌봄선언>은 ‘돌봄’이 삶의 모든 수준에서 우선시되며 중심에 놓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서울 한 요양원에서 어르신들이 물리치료를 받고 있다. 백소아 기자 thanks@hani.co.kr

[숨&결] 양창모 강원도의 왕진의사

이곳은 ‘벤자민 버튼’의 도시. 영화 속 주인공 벤자민처럼 나이를 거꾸로 먹거나 나이 먹지 않는 사람들의 도시다. 우리 사회의 가장 가치 있는 존재는 늘 더 어린 사람이다. 아기가 사람들의 관심을 받는 건 지하철 안에서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다. 사람들은 블랙홀처럼 자신을 빨아들이는 노화로부터 필사적으로 도망치려 한다. 어릴수록 더 많은 관심을 받는 이곳은, 확장된 지하철 안 같은 사회다.

사람들에게 죽음은 유령과 같다. 두려워할 뿐 실재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 듯하다. 내일 주식이 어떻게 될지, 다음달에 집값이 과연 오를 것인지와 같은 불확실한 미래에 대해서는 밤잠을 설치며 고민하지만 죽음이라는 확실한 미래에 대해서는 대체로 생각이 없다. 내가 어떤 곳에서 죽을지, 그때 내 옆에는 누가 있을지, 죽어 가는데 비용이 얼마나 들지, 그런 것들을 생각지 못한다. 삶을 쫓아가기에도 버거운 세상이라 죽음을 생각하기 쉽지 않은 탓도 있을 것이다.

며칠 전 왕진 가서 만난 송 할머니의 소식을 전해 들었다. 집에서 모시다가 욕창이 생겼던 할머니는 결국 요양원으로 보내졌다고 한다. 가족은 할머니를 끝까지 집에서 모시고 싶었다. 하지만 하루 한번 욕창 드레싱을 하러 집에 올 수 있는 의료진이 없는 이곳에서 달리 방법이 없었다. 한국의 사망자들 중 집에서 죽는 사람은 열에 한명 정도이고 나머지는 모두 병원과 요양원에서 죽는다. 국민건강보험공단이 2018년 제출한 자료를 살피면 한국의 노인은 사망하기 전 평균 707일을 요양병원과 요양원에서 지낸다. 익숙한 것은 단 하나도 없고 아끼던 사람은 아무도 없는 요양원에서 사는 707일. 할머니에게도 이제 ‘707일의 삶’이 시작되었다. 버튼이 눌러진 것이다.

할머니뿐만 아니라 우리는 모두 결국 그 버튼이 눌러진 삶을 마주해야 한다. ‘707일의 삶’은 결국 모두에게 다가온다. 어떤 대단한 삶을 살았든, 지금 얼마나 건강하든 상관없이 아무도 피해 갈 수 없다.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고 누군가의 도움에 기대어 살 수밖에 없는 707일. 707일이라고 하지만 평균일 뿐 실제로는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는 날들.

물론 좋은 죽음은 장소의 문제가 아니다. 집은 돌봄받는 장소가 아니라 방치되는 장소가 되기도 한다. 집 환경이 너무 열악해서 여건이 된다면 하루빨리 요양원으로 보내드리고 싶은 분들도 가끔 만난다. 하지만 그보다 훨씬 많은 어르신들은 대부분 혼자서라도, 할 수만 있다면 자신의 집에서 삶을 마감하고 싶어 한다. 백명의 사람이 있다면 백가지 존엄한 삶의 모습이 있다. 하지만 한국에서 죽는 모습은 하나밖에 없다. 이 모든 아름다운 사람들이, 이 모든 존엄한 삶이 모두 똑같은 모습으로 요양원과 요양병원에서 마지막을 맞이한다. 특별한 능력이 없는 한 한국에서는 내가 어디에서 죽을지를 선택할 수 없다.

‘의사 선생님을 좀 구해주세요.’ 만나고 싶다는 연락이 와서 마주한 시 보건과 공무원은 멋쩍은 표정으로 결국 이런 부탁을 했다. 방문진료를 해야 하는데 지원하는 의사가 없다는 것이다. 어찌어찌해서 지인을 소개해주었지만 그가 내년에도 계속할 수 있을지는 알 수 없었다. 동네 의원과 같은 민간의료에 손 벌리지 않고 공공의료 안에서 방문진료 인력을 체계적이고 안정적으로 공급하는 계획은 죽음의 모습을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일이다. 하지만 별다른 대책이 없다.

어쩌면 지팡이처럼 누군가에게 기대어 살 수밖에 없는 707일은 신이 인간에게 준 선물 같은 날일지도 모른다. 모진 세상을 살아내느라 너무 고생했으니 이제는 다른 사람의 도움에 의지해서 살아도 된다는 선물. 부모의 돌봄 속에 자라며 방긋 웃는 아이처럼 ‘네가 아끼는 사람들 혹은 사회의 돌봄 속에서 그들이 너를 위해 들려주는 노래를 들으며 웃음 속에서 이 세상을 떠나라’는 선물 같은 707일. 나는 그 선물을 받으며 떠날 수 있을까. 체계적인 방문진료가 불가능하다면 그 선물은 영원히 불가능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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