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오피니언 칼럼

동물 외교의 결말

등록 2021-09-15 16:18수정 2021-09-16 14:54

[세상읽기] 손아람|작가

개의 관점에서는 십수 세대 전쯤 벌어진 일이다. 2000년 6·15 남북공동선언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 김대중 전 대통령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에게 풍산개 한쌍을 선물로 받았다. ‘우리’와 ‘두리’로 이름 붙은 두 풍산개는 이듬해 서울대공원으로 집을 옮겼고, 종보존을 위한 계획교미와 인공수정을 통해 수십마리의 새끼를 낳았다. 서울대공원의 사육 환경에서 2세를 전부 감당하기 어려웠으므로 새끼들은 여러 지방자치단체와 산하 공원으로 보내졌다. 또다시 수십마리의 새끼가 태어났다. 지자체도 불어나는 생명을 다 감당할 수 없었다. 일반인 대상의 유상 분양이 실시되었다. 북한에서 인증된 경로로 들여온 유일한 혈통이라는 희소성과 남북 수장의 교환 선물이라는 상징성을 높이 산 품종견 애호가들이 공매에 뛰어들어 아낌없이 지갑을 열었다.

분양 경쟁이 상당히 치열했는지 근거를 알 수 없는 소문이 떠돌았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선물받은 개는 사실 순혈 풍산개가 아니며, 노무현 전 대통령이 방북했을 때 진짜 순혈종 풍산개 한쌍을 비밀리에 받아와서 민간에 양육을 위탁했다는 것이다. 이 전설 속 동물 한쌍이 낳은 자견을 어렵사리 확보했다고 주장하는 장사꾼들이 벌였던 야바위의 흔적이 지금도 인터넷 구석구석에 남아 있다.

2013년 우리와 두리가 죽으면서 풍산개는 외교관의 역할을 마쳤다. 우리와 두리가 남긴 무수히 많은 후손은 이제 스스로 살아남기 위해 싸우는 중이다. 상품 가치가 소진되기 전에 이윤을 뽑아내려는 조바심에 사로잡힌 업자들이 공산품을 찍어내듯이 근친교배를 시켰을 테니 자손의 수는 수천마리에 이를 것이다. 유전적 장애를 가진 개들은 태어나자마자 솎아냈을 테고, 건강하게 자란 개들이 조상님들처럼 귀한 대접을 받고 있을지도 알 수 없다. 풍산개의 외양은 흔한 한국의 시골 개와 구분하기가 쉽지 않다. (엄밀히 말하자면, 풍산개는 함경남도 풍산 지방에서 유래한 것으로 알려진 토종 시골 개를 일컫는 이름이다.) 노예로 전락한 왕족처럼 쇠창살 안에서 여생을 보내는 개는 몇마리나 될까? 길거리에 버려졌거나, 혈통에 무관심한 보호소의 수의사가 안락사시켰거나, 복날 개장수에게 딱 체중만큼의 가치를 인정받고 명을 다한 개들은?

얼마 전 문재인 대통령이 북에서 선물받은 풍산개 ‘곰이’가 낳은 새끼들이 지자체로 분양된다는 소식을 들었다. 대통령 당선 전부터 유기 동물들을 입양하여 길러왔던 대통령의 동물을 사랑하는 마음은 의심하지 않지만, 이 풍산개와 그 후손의 운명은 정해져 있다. 동물을 외교 선물로 받는 순간부터 그 운명은 벌써 정해져 있었다. 제아무리 유능하고 윤리적인 정부라도 생명을 영원히 책임질 수는 없고, 생명에 차별적인 시장 가치를 부여하고 싶어 하는 인간의 욕망을 억누를 수도 없다. 동물 외교의 비극적이고 필연적인 결말이다.

태조 왕건은 거란으로부터 낙타를 선물받았고, 조선 태종은 일본으로부터 코끼리를 선물받았다고 한다. 기록에 따르면 이 낙타와 코끼리들 역시 불행한 최후를 맞았다. 희귀 동물을 선물로 주고받는 외교적 관행은 아마도 인간을 선물로 주고받던 관행만큼 긴 역사를 가질 게 틀림없다. 인신 거래가 외교의 범주에서 진작 퇴출되었듯이, 살아 있는 생명을 선물로 주고받는 외교적 관행의 야만성에 대해 적어도 이번 세기 내로는 인류가 합의에 도달할 것이라고 믿는다. 나는 그 첫걸음을 우리 정부가 시작하기를 바란다.

이재명 경기도지사는 동물복지정책의 의미 있는 진전을 이뤄냈고, 이낙연 의원은 다양한 동물권 공약을 발표했다. 윤석열 전 검찰총장은 유기 동물을 일곱마리나 입양했고, 홍준표 의원, 추미애 전 장관, 최재형 전 감사원장도 반려동물과 함께 사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성향은 각기 다르지만, 마치 누가 대통령에 당선되더라도 우리 정부는 동물을 사랑하는 정부가 될 것처럼 보인다. 대통령이 의지를 갖기만 한다면, 방문국에 사려 깊게 가공한 메시지를 미리 전달하여 외교적 결례를 범하지 않고도 많은 생명을 살릴 수 있다. 예를 들어 이런 서신이라면 어떨까?

“하나의 생명을 끝까지 책임지는 것은 우리가 가진 역량을 넘어서는 일임을 겸허하게 고백하며, 생명을 선물로 받지 않는 우리 정부의 입장을 양해해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다만 언젠가 귀국 원수가 반려동물과 함께 한국을 방문한다면, 대통령은 기쁜 마음으로 청와대의 문을 열어 귀빈들을 맞이할 것입니다.”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오피니언 많이 보는 기사

한동훈의 ‘생닭’과 윤석열의 ‘대파’ 1.

한동훈의 ‘생닭’과 윤석열의 ‘대파’

대통령이 위험하다 [세상읽기] 2.

대통령이 위험하다 [세상읽기]

적개심이 된 ‘지못미’…검찰 정치보복성 수사가 부추겨 [이철희의 돌아보고 내다보고] 3.

적개심이 된 ‘지못미’…검찰 정치보복성 수사가 부추겨 [이철희의 돌아보고 내다보고]

[사설] 이종섭 귀국 핑계 ‘방산회의’도 끝, 이제 대통령이 정리해야 4.

[사설] 이종섭 귀국 핑계 ‘방산회의’도 끝, 이제 대통령이 정리해야

[사설] 총선 앞 막 쏟아낸 감세 공약, 이제 어찌 감당할 건가 5.

[사설] 총선 앞 막 쏟아낸 감세 공약, 이제 어찌 감당할 건가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