엠넷 <스트리트우먼파이터> 참가 여성 댄스 크루. 사진 왼쪽 위부터 ‘라치카’‘와이지엑스(YGX)’‘웨이비’‘원트’‘훅’‘홀리뱅’‘프라우드먼’‘코카N버터’. 사진 엠넷
[젠더 프리즘] 이정연 젠더팀장
춤을 추거나, 춤을 보는 걸 참 좋아한다. 기억하기로는 6살 무렵 시작된 아주 오래된 나의 취미다. 그런데도 댄스 경연 프로그램은 한번도 챙겨 보지 않았다. 경연 프로그램 특유의 편집 술수와 극적인 갈등과 긴장감을 감상하는 데 여가시간을 쓰고 싶지 않았다.
여성 스트리트 댄스 경연 프로그램 <스트릿 우먼 파이터>(스우파)를 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여성 스트리트 댄스 크루가 나온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시큰둥했다. 별다를 바 없는 댄스 경연 프로그램이겠거니 싶었다. 그래도 젠더팀을 맡고 있으니 의무감에 흘깃 보다 말기를 여러 차례였다. 그리고 지금, 그 판단을 매우 후회한다. ‘별다를 바 없다’는 의견을 완전히 철회했다.
스우파는 회를 거듭해가며 탈락 참가팀을 꼽아 마지막에 우승팀을 가리는 ‘서바이벌’ 형식이다. 대중 앞에 자신과 크루의 이름을 내세우고 등장할 기회가 많지 않은 댄서들은 ‘생존’을 위해 죽을힘을 다해 노력하고 경쟁한다. 그러나 여기에 담긴 서사는 그게 전부가 아니다.
각 크루와 댄서의 캐릭터를 보여주는 데 주력한 초반 회차를 지나 중반부로 가면서 점점 더 눈에 들어오는 장면이 있었다. 서로가 경쟁자인 크루들의 반응이 잡히는 장면이었다. ‘춤꾼’들이 ‘춤’으로 무대 위에 이야기를 풀어놓으면 이를 지켜보던 댄서들은 환대와 응원을 아끼지 않았다. “소름 돋았어.” “와, 대단하다.” “저거 너무 좋다.” 환대와 응원은 촬영한 스튜디오에 머무르지 않고, 여성 시청자들 사이에서 증폭됐다.
여성 댄스 크루들과 여성 시청자들 사이의 이런 화학작용은 단지 ‘여성’이라는 공통점이 있어서 가능한 건 아니었다. ‘춤’의 기술과 예술의 완성도만으로 가능한 것도 아니었다. 스우파와 이것을 둘러싼 에너지는 어디에서 비롯한 것일까.
예능 프로그램을 본방송으로 챙겨 본 적이 거의 없는데 지난 화요일 밤 티브이를 켰다. 스우파 5회를 보는 도중 갑자기 크게 숨을 몰아쉬었다. 본격적인 춤 영상이 나오는 장면도 아니었다. 각 크루가 무대를 어떻게 꾸릴지 회의하는 장면이었다. 댄스 크루 ‘라치카’는 경연에 참가한 8개 크루의 깃발을 보여주자는 이야기를 나눴다. 이미 1개 크루가 탈락했는데, 이 크루도 포함해서 말이다. 라치카의 리더 가비는 말했다. “그래, 여기 있는 모든 여자를 응원한다는 의미로!” 라치카가 무대를 준비하며 고른 노래는 비욘세의 ‘런 더 월드’(Run the World·세상을 이끌어). ‘여성들이 세상을 이끈다’는 주제를 담은 노래다.
스우파 현상의 답이 여기 있었다. 가비의 설명 뒤에 큰 숨을 몰아쉬고, 방송을 보며 내내 생각했다. “탈락하거나 탈락할 위기에 있거나 승리하거나 승리에 가깝다거나 그런 건 모두 중요하지 않아. 지금 여기 무대를 펼치는 모든 여자 그리고 그들을 보고 있는 많은 여자를 응원하고 싶어.” 라치카가 던진 메시지는 모든 크루와 여성을 응원한다는 것이었지만, 지금까지 방영된 내용을 보면 라치카는 이번 경쟁에서 하위권에 머무르고 있다. 결과는 아직 나오지 않았다.
어떤 결과가 나오건 가비의 메시지는 영영 잊지 못할 것이다. ‘세상의 모든 여자를 응원한다’는 문구는 그가 처음 말하거나 발견한 건 아니다. 흔히 쓰이고 말한다. 그런데도 이 시점, 시대의 공기가 ‘세상의 모든 여자를 응원한다’는 말을 듣는 것만으로도 힘을 얻게 한다. 백래시(진보적인 사회 변화에 반발하는 움직임)가 만연한 한국 사회에서 여성들이 이런 응원과 환대마저 어디에서도 들을 수 없다면 점점 숨이 막혀가고야 말 거다.
그래서 기회가 닿는 한 힘주어 말하고 싶다. 당장 이 응원들이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을지라도 숨 막히는 이 사회의 공기를 언젠가 뚫고 지나가는 데 뒷심이 될 수 있을 테니까. 지난달 말 나온 ‘2020년 사망원인통계’를 보면 20대 여성 자살률(인구 10만명당 자살 사망자 수)이 전년보다 16.5% 증가했다. 최근 5년간 20대 여성 자살률은 55.2% 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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