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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2022년에 다시 만나자, 인권센터

등록 2021-10-04 18:05수정 2021-10-05 02:40

[숨&결] 정민석ㅣ인권재단 사람 사무처장

9월30일 이삿날 아침이 밝았다. 이삿짐을 마지막으로 옮기고 건물 명의를 다른 사람에게 이전하는 날이다. 국내 유일의 민간 인권센터가 잠시 문을 닫는 날이기도 하다. 마지막 출근길은 아쉽고 복잡한 마음에 발걸음이 무겁기만 했다.

인권센터 곳곳에 쌓인 인권운동의 역사를 살펴보며 한달 가까이 이삿짐을 포장했다. 켜켜이 쌓인 먼지마저 소중했다. 인권단체에서 발행한 소식지부터 인권도서관에 마련된 도서들, 각종 회의록과 인권침해 대응을 위한 기록들, 누군가에겐 쓸모없고 하찮게 여겨지는 문서일지 몰라도 그 기록엔 인권활동가들의 노력이 고스란히 배어 있었다. 일부는 장기 보관을 위해 컨테이너 박스로 옮겨졌고, 일부는 지역 도서관에 기부를 했다. 장기수 어르신들의 붓글씨와 민중 예술가들의 작품도 소중히 옮겨졌고, 인권센터에서 보관 중이었던 박래전 열사 유품은 이한열기념관에서 보관해주기로 했다.

60평 남짓한 인권센터는 시민들의 힘으로 만든 인권운동의 아지트였다. 2010년 가을 문정현 신부님 헌정 콘서트를 출발점으로 인권센터 설립 모금이 시작되었다. 이후 시민들이 저금통을 모아주었고, 박래전 열사 민주화운동 보상금이 보태졌다. 마지막엔 1계좌 100만원씩 빌려 부족한 설립 비용을 마련하기도 했다. 2914명 시민 주춧돌의 십시일반 참여로 만들어졌기에 공간 그 자체가 자부심이었고, 권력에 눈치 보지 않아도 되었으며, 혐오가 출입할 수 없는 안전한 공간으로 운영될 수 있었다.

이곳은 특히 사회적 약자, 소수자들이 편히 찾아올 수 있는 곳이었다. 애써 기획한 행사의 대관이 불허되거나 행사 이름조차 편히 붙이지 못했던 소수자 단체들에 환대의 의미를 가진 공간이었다. 성중립 화장실을 최초 도입하면서 트랜스젠더들이 참여하는 모임과 전시가 안전하게 열릴 수 있었고, 인간면역결핍바이러스(HIV) 감염인들은 죄책감과 두려움 없이 편하게 밥 한끼 나누며 서로의 삶을 이야기할 수 있었다. 휠체어 이동을 위해 엘리베이터를 설치한 것은 물론 모든 공간에 문턱을 없앴다. 기자회견, 토론회, 강좌, 영화제, 후원의 밤, 총회 등 인권단체가 기획하는 많은 활동이 이곳에서 펼쳐졌다. 코로나19 이후엔 인권운동의 대응 전략이 이곳에서 주로 논의되기도 하였다. 한 주에 1개의 행사가 인권센터에서 열렸다고 해도 족히 1만명 이상이 이곳을 다녀갔을 것이다.

반갑지 않은 손님이 찾아오기도 했다. 2014년 서울시 인권헌장 쟁점이 뜨거웠을 당시 성소수자 혐오 세력이 인권센터에 난입하겠다고 하자 인권옹호자들은 ‘인권이 중심인 공간에 혐오가 들어설 자리는 없습니다.’ 피켓을 들고, 이곳을 함께 지켰다. 2015년 세월호 1주기 추모집회가 개최된 이후에는 경찰에서 ‘인권재단 사람’을 압수수색을 했고, 이후 박래군 활동가를 구속 수사한 바 있다.

이삿짐이 떠나고, 인권센터 간판마저 떼어진 그곳에 남아 손때 묻은 공간을 천천히 살펴보았다. 사람의 역사가 남아 있는 이곳에서 나만의 작별의식을 꽤 성대하게 치렀다. 벽면에 덩그러니 남겨진 세계인권선언문을 읽었고, 아무것도 남지 않은 바닥을 정성스럽게 쓸면서 이곳에서 만났던 사람들을 떠올렸다. 그리고 지난 7월16일 세상과 작별한 퀴어 페미니스트 난새 활동가를 추모하는 마음으로 그가 일했던 자리를 향해 인사를 건넸다.

이제 잠시 인권센터 활동을 내려놓는다. 그리고 인권운동 공간 지원을 위해 새로운 밑그림을 그리려고 한다. 소수자를 환대하는 공간, 사무공간이 없어도 편히 활동할 수 있는 공간, 작은 인권단체의 성장을 지원하는 공간, 코로나19 이후 비대면-대면 행사와 회의가 가능한 공간, 인권을 옹호하는 시민이라면 편히 찾아올 수 있는 공간의 역할을 더 담아내고자 한다. 인권센터에 고립된 인권의 가치가 아니라, 인권센터가 평범한 공간일 수 있는 미래를 꿈꾸며 새로운 도전을 다시 시작한다. 2022년 다시 만나자, 인권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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