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나마’ ‘파라다이스’ ‘판도라’…. 로마자 머리글자가 ‘피’(P)인 것 말고 공통점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누군가는 셋 사이를 별자리마냥 보이지 않는 선으로 연결했다.
국제탐사언론인협회(ICIJ)는 100여개국 기자 수백명이 협업해 탐사 취재와 보도를 하는 글로벌 네트워크다. 우리나라에서는 <뉴스타파>가 참여하고 있다. 2013년부터 전세계 유명짜한 정치 지도자, 억만장자, 스타 등이 조세회피처에 자산을 빼돌리는 실태를 파헤쳐 보도하는 데 주력해왔다. 파나마 페이퍼스(2016년) 때부터 주요 탐사 프로젝트에 ‘페이퍼스’라는 이름이 붙었다. 파라다이스 페이퍼스(2017년)와 판도라 페이퍼스(2021년)가 뒤를 이었다.
‘페이퍼스’는 미국 국방부의 베트남전 비밀보고서인 ‘펜타곤 페이퍼스’를 <뉴욕 타임스>가 폭로한 것에 대한 오마주다. 그러나 머리글자가 모두 ‘P’인 건 우연이다. 파나마 페이퍼스는 파나마의 악명 높은 로펌 ‘모색 폰세카’의 유출 자료를 분석한 데서 따왔다. 파라다이스 페이퍼스는 조세회피처가 탈세자의 낙원임을 빗댄 듯하다. 판도라 페이퍼스에는 판도라 상자를 연다는 뜻이 담겨 있음을 어렵잖게 유추할 수 있다.
프로젝트 이름은 참여 팀들이 제가끔 제출한 것을 두고 표결로 정한다. 아시아 태풍 위원회에 속한 14개국이 제출한 이름으로 태풍 이름을 붙이는 것과 흡사한데, 여기에 다수결이 결합한 셈이다. 판도라 페이퍼스 프로젝트의 경우 <뉴스타파>는 ‘다크 페이퍼스’를 제출했다고 한다. 한껏 비장한 이 이름이 다른 나라 팀들의 지지를 얻었으면 ‘P의 별자리’는 그려지지 못했을 터이다.
올해의 판도라 페이퍼스는 앞서 두 페이퍼스를 능가한다. 전·현직 국가 정상만 35명에 이른다고 한다. 이전 프로젝트에서 확인된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등에 비하면 한국인은 경량급이었는데, 모처럼 면을 세워줄 인물이 등장했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다. 의아한 건 한국 언론의 태도다. 이수만 에스엠(SM)엔터테인먼트 총괄 프로듀서의 조세 회피 의혹 보도는 차고 넘쳤는데, 이 부회장에 관한 보도는 손에 꼽을 정도다. 판도라 상자가 열렸는데도 한국은 그에게 영원한 파라다이스인 듯하다.
안영춘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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