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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선량하고 유해한 전문가들

등록 2021-10-18 18:00수정 2021-10-19 02:33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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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결] 강병철ㅣ소아청소년과 전문의

아이는 날로 나빠졌다. 감정을 다스리지 못하고,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했다. 의사는 미국에서 융학파의 정통 심리학을 공부했노라 했다. 아이가 나빠진다고 알리는 데도 고액의 상담료를 내야 했다. 그는 귀 기울이지 않았다. 더 관용적인 태도로 아이의 말을 진심으로 경청하라 했다. 약을 끊기로 아이와 합의했다는 말을 들었을 때, 내 귀를 의심했다. 그 뒤로 이어진 긴 입원과 고통스러운 회복 과정은 가족 모두의 삶에 가장 어둡고 아픈 기억으로 남았다.

약이 없던 시절에는 정신질환을 겪어도 해줄 것이 없었다. 자신과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도록 시설에 수용하고, 거친 행동을 하면 신체를 구속했다. 학대와 인권유린이 만연했다. 치료제 개발은 천지개벽이었다. 약을 먹으면 가장 심한 환자도 현실과 환상을 구분하고, 제한적이나마 사회적 기능을 수행했다. 약이 점점 개량되자 탁월한 성취도 나왔다. 의사가 되어 비슷한 처지에 있는 이들을 돕거나, 노벨상을 수상한 사람도 있다. 많은 전제조건이 붙지만, 이제 약만 잘 먹으면 정상적으로 살 수 있다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당사자는 약을 거부한다. 왜 그럴까? 처음 진단받으면, 약 먹는 것을 불치병에 걸렸음을 인정하는 행위로 생각한다. 병을 받아들인 뒤에도 정신에 영향을 미치는 약은 께름칙하다. 조종당하는 기분이 든다. 감정과 사고가 정말 내 것인지, 약의 작용에 불과한 것인지 끊임없이 자문하는 건 심각한 실존적 문제다. 약을 꾸준히 복용하던 사람도 기회만 있으면 끊고 싶어 한다. 부작용이 힘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신질환을 극복하는 데 가장 중요한 요소로 두가지를 꼽는다. 병을 받아들이는 것과 약을 꾸준히 먹는 것이다.

또 하나 중요한 걸림돌이 있다. 약에 대한 무지와 편견이다. ‘순수한’ 내가 오염된다, 화학물질은 나쁘다, 무한이윤을 추구하는 제약회사에 이용당한다는 서사가 사회를 지배한다. 사람은 모르는 일에 대해 ‘모 아니면 도’ 식으로 생각하게 마련이다. 어떤 서사가 한번 힘을 얻으면 거기 얽힌 많은 맥락을 놓친 채 쉽게 판단을 내린다. 이때 복잡한 현실의 갈피를 잡고, 고통받는 이에게 도움이 되는 길을 알려주는 전문가가 필요하다.

우리 사회에서 전문가를 자처하는 이들은 책무를 바로 수행하고 있을까? 언제부턴지 심리나 상담 관련 직종이 크게 늘었다. 복잡한 현대사회에서 정신적 어려움을 겪는 사람이 늘고, 생활에 여유가 생기면서 작은 문제에도 전문적인 조언을 구하려고 하기 때문일 것이다. 어려움에 처한 사람이 손쉽게 양질의 서비스를 받을 수 있다면 좋은 일이다. 문제는 많은 ‘전문가’들이 한계를 잘 모른다는 데 있다.

일상의 사소한 갈등은 상담으로도 좋은 결과를 얻는다. 주요 정신질환은 다르다. 상담치료만으로 좋아지기는 불가능하다. 이들의 약을 끊는 것은 고공에서 외줄 타는 사람의 줄을 끊는 것과 같다. 그런데도 이른바 ‘전문가’들은 상담을 통해, 가족치료를 통해, 가족이 이런 말을 하고 저런 말을 하지 않으면, 내면아이를 잘 보살피면, 주요 정신질환이 낫는다고 믿는다. 병도 모르고, 치료법도 모르니 어찌 전문가라 할 것인가? 이런 무지는 단기코스로 간단한 상담을 할 수 있는 자격을 딴 사람한테서만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입이 가벼워 설화를 많이 일으켰으나 그래도 한국 심리학계를 대표한다는 자가 저서에 버젓이 정신질환은 만들어낸 병이라고 쓴다. 내면아이라는 사이비 이론을 떠드는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고, 유년기 트라우마를 피하려면 부모가 이렇게 저렇게 행동해야 한다는 ‘멘토링’이 선풍적 인기를 끈다. 나쁜 마음에서 그랬으리라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남의 질병과 인생을 책임지려면 선의보다, 친절보다, 공감보다 지식이 훨씬 중요하다. 전문 분야에서 선의와 무지의 결합은 대개 재앙으로 치닫는 지름길이다.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는 사람이 남을 이끌 수는 없다. 슬프다. 세상에는 왜 이리 거짓 선지자가 많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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