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쌍용차 파업 사태에 대해 기억하는 또 하나는 바로 파업 노동자들의 ‘고립’이었다. 쌍용차 노조의 상급 단체인 금속노조의 15만 조합원이 부분 파업을 벌이긴 했지만, 어디까지나 형식적 ‘연대’ 연출에 불과했다. 그 핵심 동력인 현대차지부의 대의원들은 ‘동조 파업’ 제안을 부결시켜 의미 있는 연대가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다.
박노자ㅣ노르웨이 오슬로대 교수·한국학
요즘 내 주위에는 <오징어 게임>을 보지 않은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다. 한국산 드라마뿐만 아니고 그 어느 나라의 드라마도 이 정도로 세계적인 인기를 누리는 경우는 여태껏 거의 없었다. ‘생존게임’이라는 장르가 비교적 쉽게 대중의 주목을 받긴 하지만, 2000년의 일본산 영화 <배틀로얄> 같은 유사한 장르의 기존 작품들도 이 정도의 인기를 얻지는 못했다. 대중성이 높은 장르나 치밀한 줄거리 구성, 수준 높은 연출 등이 <오징어 게임>의 성공에 기여한 것이 확실하지만, 그것보다 더 큰 것은 이 영화의 의미심장한 메시지였다. 적어도 노르웨이에서는, <오징어 게임>을 둘러싼 논의는 주로 그 메시지에 집중돼 있다.
<오징어 게임> 화면에 등장하는 선혈이 낭자한 잔혹극은 물론 신자유주의적 우승열패, 약육강식, 승자독식을 형상화한 것이다. ‘쩐의 전쟁’에서 패배하여 사회적 낙오자가 된 약자들은, 그래도 승자의 대열에 합류해보려는 일념으로, 지푸라기라도 붙잡으려는 심정으로 승산이 거의 없는 살인적 게임에 합류하여 그 비참한 죽음으로 지배자들에게 가학적 즐거움을 주는 것이다. 456명의 현대판 검투사와 그 살인 장면을 눈요깃감으로 삼는 6명의 브이아이피(VIP)로 나누어진 극중의 소사회는 틀림없이 “1%에 의한, 1%를 위한” 신자유주의 사회의 어떤 극단적 형태를 비유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이 드라마의 이러한 상징성은, 2008년 대공황 이후 신자유주의 비판에 충분히 익숙해진 전세계 시청자들에게는 매우 쉽고 자연스럽게 다가온다.
그러나 이 밖에도 간과할 수 없는 또 하나의 중요한 메시지는 바로 피해자들의 연대의 결핍, 그리고 피해와 가해의 복잡한 중첩이다. 검투사 노릇을 강요받게 된 고액 채무자들은 궁극적으로 살인 쇼를 즐기는 부자들 본위로 돌아가는 사회질서의 피해자들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그들도 동료의 죽음을 전제로 하는 코스에서 일단 자기 발로 승리를 향해 달리는 것이다. 연대해서 살인 쇼의 주최 쪽에 함께 맞서려는 시도는 거의 보이지 않으며, 동료를 위해 자신을 희생해 죽어주는 경우만이 드물게 보인다. 살인 게임 과정에서 희생된 450여명의 등장인물 중에는 상당수가 자기 손에 동료의 피를 묻힌 것이다. 가해자들이 운영하는 체제에 조직적으로, 연대적으로 저항하지 못하는 피해자들은, 결국 불가불 스스로도 가해자가 된다. 어쩌면 이 부분이야말로 이 드라마가 던져주는 메시지의 핵심인지도 모른다.
이 드라마의 주인공인 ‘성기훈’은 2009년 쌍용차 파업을 모델로 한 “드래곤 모터스” 파업의 결과로 일자리를 잃고 인생의 위기를 맞는다. 드래곤 모터스 파업 때 경험한 살인 진압은 ‘성기훈’에게 평생 씻기지 않는 트라우마가 되었던 것이다. 실제 테이저건과 최루액 등이 사용된 쌍용차 파업 진압은 군사작전을 방불케 할 정도로 잔혹했으며, 그 잔혹성은 많은 이의 기억 속에 선명히 남아 있다. 그러나 내가 2009년 쌍용차 파업 사태에 대해 기억하는 또 하나는 바로 파업 노동자들의 ‘고립’이었다. 쌍용차 노조의 상급 단체인 금속노조의 15만 조합원이 부분 파업을 벌이긴 했지만, 어디까지나 형식적 ‘연대’ 연출에 불과했다. 그 핵심 동력인 현대차지부의 대의원들은 쌍용차 파업을 지원하는 ‘동조 파업’ 제안을 부결시켜 의미 있는 연대가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다. ‘비즈니스 프렌들리’(기업 친화성)로 악명 높았던 이명박 적폐 정권은 쌍용차 노동자들에게 직접적 가해를 자행했지만, 동료들을 도와주지 않고 오로지 자신들의 안위에만 관심을 둔 또 다른 잠재적 피해자인 동종 업계의 노동자들은 과연 그 비극에서 어떤 역할을 맡았던 것일까? 피해자이면서도 가해자들의 “게임”에 쉽게 말려들어 결국 서로에게 가해자가 되는 <오징어 게임> 속 수백명의 현대판 검투사는, 바로 이와 같은 실제 상황에서 시사를 얻어 재현된 인물들이 아니었을까?
<오징어 게임> 같은 작품이 다른 곳이 아닌 한국에서 만들어진 만큼, 이와 같은 상황은 최근 이 나라에서 전형적이다. 같은 노동자라 해도, 입장이나 신분이 서로 약간이라도 다르기만 하면 연대라고는 없다. 내가 비교적 잘 아는 대학가를 예로 들자. 4년제 대학 전체 전임 교수(약 6만6천명)의 1% 정도 되는 600여명을 조직한 교수 노조가 있다. 극소수의 교수만이 참여하는 노조지만, 이미 보수화된 대학교수 사회치고는 아마도 가장 진보적인 분들의 모임이라고 봐도 된다. 같은 대학에는 약 1700명의 비정규 교수(시간 강사 등)가 조합원으로 있는 비정규 교수 조합도 존재한다. 양쪽 조합에는 교육과 연구에 종사하는 교원 노동자들이 가입되어 있고, 양쪽은 정치 성향상 ‘진보’로 분류된다. 그러나 정규 교수 조합원과 비정규 교수 조합원들이 연대 투쟁을 한 적이 있느냐고 물었더니 ‘거의 없다’는 답이 돌아왔다. 같은 진보 성향의, 같은 대학 소속의, 같은 연구자지만, 신분상 차이가 나면 같이 손잡고 연대하지는 않는다. 과연 대학만 그런가? <오징어 게임>은 바로 이와 같은, 연대가 불가능한 세상을 극단적 모습으로 상징적으로 보여준 작품이 아닐까?
<오징어 게임>의 악몽 같은 세계에서는, 살인 게임 참가자의 상당수는 사실 게임 조직자들의 세계관을 암묵적으로 공유하고 있다. 조직자들은, 참가자들의 ‘자발적’ 동의가 있는 이상 ‘인간 경마장’에서 참가자들에게 서로 죽고 죽이는 게임을 시켜 돈벌이해도 되는 걸로 인식하고 있다. 한번 밖에 나왔다가 다시 제 발로 게임 현장으로 돌아가는 참가자들도, 동료들이 다 죽어야 최종 승자가 상금을 탈 수 있는 약육강식의 논리를 일단 현실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문제는, 드라마가 아닌 대한민국의 현실에서도 피해자들이 가해자들의 논리를 받아들이는 경우가 너무 허다하다는 것이다. 예컨대, 상시·지속 업무임에도 비정규직을 고용하는 애당초의 불공정, 비정규직 차별이라는 커다란 부정의에 눈을 감은 채 신자유주의적 지배자들이 내세우는 ‘절차적 공정’이라는 기만적 수사를 그대로 받아들여 인천국제공항공사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를 반대해 청와대 국민청원까지 낸 수십만명의 기층민은, 지배자들의 이데올로기에 저항하지 못하는 피지배자들의 전형적 사례를 보여준 것은 아닐까? 만약 피해자들이 평등한 연대와 집단적 저항을 가능하게 하는 대안적 신념을 공유하지 못하면 궁극적으로 극소수에게만 이득이 되는 ‘오징어 게임’은 절대 멈추지 않을 것이다. <오징어 게임>의 배경이 된 지난 20여년 동안의 한국 신자유주의 역사, 피해 대중의 분열과 원자화의 역사야말로 이 사실을 입체적으로 보여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