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오피니언 칼럼

시간 없음의 방정식

등록 2021-11-03 17:54수정 2021-11-04 02:33

[숨&결] 강도희·최연진|대학원 석·박사 과정(국문학)

강남 3구 출신이 많은 게 매년 논란거리인 학교의 인문대학 대학원에선 매우 이례적으로, 나는 출퇴근 시간만 조금 조정해 근무하는 풀타임 직장인인 채로 학위 과정 3년을 보냈다. 그리고 이번 여름, 졸업을 했다. 박사과정엔 등록하지 않았는데, 쉬엄쉬엄 밀린 책도 보며 앞으로 무슨 공부를 할지 차분히 생각해보라는 말씀을 따르기엔, 지난 학기 논문을 벼락치기한다고 없는 연차를 닥닥 긁어 써버린 탓에 그럴 여력이 없다는 게 가장 큰 이유이다.

그래도 공부는 마저 해야 하지 않겠냐는 주위의 걱정에 적당히 답하며 이해할 수 없었던 건, ‘시간이 없다’는 말을 다들 도통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다는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노동이 최대 연구 주제 중 하나인 인문학을 하는 사람끼리 새삼 말하기도 그렇지만, 나는 임노동자다. 말인즉, 내 노동력을 시간 단위로 사장님께 내다 팔고 생계비를 타서 쓴다. 유별나게 시간이 남아돌아서 당근마켓에 나눔하는 마음으로 그러는 건 아니고, 내가 가진 것 중 거래가 합법인 게 시간뿐이라서다.

그렇다고 일보다는 공부에 전념하라는 게 장기라도 하나 밀매하여 생활비를 마련하란 뜻이야 물론 아니었겠지만, 내 입장에선 그것 외에 시간을 벌어 올 방법이 있다면 좀 알려달라 되받고 싶은 게 솔직한 심정이다. 대학원에 가겠답시고 호기롭게 사표를 던졌다가 반년도 못 돼 ‘텅장’을 들고 쪼르르 재입사한 경험에 입각해 말하건대, 나 하고 싶을 때 하루 서너시간만 일할 수 있는 일자리치고 주 40시간보다 덜 일하는데도 나를 먹이고 입히고 지붕 덮인 집에서 재운 다음 학교까지 보내줄 수 있을 만한 시급을 주는 곳은 없기 때문이다. 내가 굳이 직장과 학업을 병행하는 고행을 자처한 것 역시, 퇴사하고 잠시 강사로 일했던 학원에서 월세와 생활비를 다 벌려면 결국 월 100시간 이상을 일해야 한다는 깨달음 때문이었다. 하란 공부는 안 하고 돈이나 벌러 다닌 나이롱 연구자라 잘은 모르지만, 아마 이런 걸 노동의 위계화라 부를 것이다.

나를 포함해 임노동자에게 자유롭게 운용할 수 있는 시간이란 결국 한달 720시간에서 월 생계비를 자신의 시급으로 나눈 값을 제한 시간이다. 문제는 전일제 정규직일 경우와 그렇지 않을 경우의 평균시급은 복지비나 보험 혜택 등을 생각하면 꽤 차이가 나므로, 사실 매일 8시간 이상 일하지 않고 서울에서 홀로 스스로를 부양하기는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생계비 역시 덜 먹고 덜 쓰는 건 사실 별 소용이 없고, 주거비를 줄이는 게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지만, 이건 또 전세자금 대출이 필수이므로 역시 정규직 고용만이 답이다. 그마저도 사무실이 밀집한 강남 근처 전세를 얻는 것은 어불성설이니 수도권 직장인에게 대개 주거비의 감소는 통근 시간의 증가, 곧 간접적 노동시간의 증가를 의미한다. 나 또한 왕복 3시간을 지하철에서 보내는 것으로 열심히 내 주거비를 보조 중인 세입자이다.

결국 이것저것 제하고 나면 내 시간 중 자유롭게 쓸 수 있는 시간은 밥 먹는 시간과 잠자는 시간 정도인데, 평균 다섯시간의 수면 끝에 비몽사몽 도착한 사무실 책상에서 점심마다 편의점 김밥을 씹으며 꾸역꾸역 논문을 채워 쓴 끝에 터득한바, 이건 사실 수명을 깎아서 쓴다는 점에서 매혈과 크게 다르지는 않은 것 같다. 입학 전엔 석달에 한번 꼬박꼬박 전혈을 했던 헌혈의 집에서 병원 가서 철분이나 타먹으라며 쫓겨난 건강검진 낙제자의 경험에서 우러나온 비유이니 믿어도 좋다.

하여, 이젠 깎아다 쓸 수명이 아슬아슬해진 나의 시간 없음을 면구스러워하도록 만드는 이 고매한 학풍이 다소 고까워진 나는 이제 모교로는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이곳 외에도 공부할 곳은 많고 얻은 것도 많았으니 아쉬움은 없지만, 단지 좀 궁금하기는 하다. 먹고사는 일에 초탈한 게 학자의 자질이라면, 나 하나 먹이기가 이렇게 막막한 시대에 학문을 할 수 있는 건 누구인가. 모를 일이지만, 일단 나는 생각할 시간이 없으므로 이만 줄인다.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오피니언 많이 보는 기사

5평 토굴의 스님 “편하다, 불편 오래되니 ‘불’ 자가 떨어져 버렸다” 1.

5평 토굴의 스님 “편하다, 불편 오래되니 ‘불’ 자가 떨어져 버렸다”

윤석열 대통령은 9수를 했다 [권태호 칼럼] 2.

윤석열 대통령은 9수를 했다 [권태호 칼럼]

[사설] 해병대 수사 외압, 대통령실 언제까지 숨길 순 없다 3.

[사설] 해병대 수사 외압, 대통령실 언제까지 숨길 순 없다

윤석열과 박근혜, 그 불길한 도돌이표 4.

윤석열과 박근혜, 그 불길한 도돌이표

과학적 근거의 의료계 통일안? 증원 유예하고 1년 ‘투자’하자 [왜냐면] 5.

과학적 근거의 의료계 통일안? 증원 유예하고 1년 ‘투자’하자 [왜냐면]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