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의힘 윤석열 대선 후보가 6일 오후 서울 송파구 올림픽공원 평화의광장에서 열린 제5회 대한민국 청년의 날 기념식에서 참석자들과 함께 \'청년, 미래의 시작\' 손 피켓을 들어 보이고 있다. 연합뉴스
[젠더 프리즘] 이정연ㅣ젠더팀장
강간 피해자 ‘마리’는 어느새 범죄자가 되고 말았다. 강간 피해로 끔찍하게 지쳐가는 와중, 수차례 반복되는 피해 진술은 그를 벼랑 끝으로 몰았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척 일상을 이어가는 마리를 보고 이웃들은 ‘피해자가 저럴 리 없어’라고 손가락질한다. 결국 마리는 자신의 진술을 번복하고 만다. 그는 ‘허위 진술’을 했다고 시 정부한테 고소를 당하기에 이른다. 3년이 흘러서야 마리를 강간했던 범인은 잡힌다. 2년여 전 나온 책 <믿을 수 없는 강간 이야기> 속 이야기다. 소설이 아닌 탐사보도 르포르타주다. 그러니까 이 믿을 수 없는 이야기는 실제 있었던 일이다.
지난 5일 오후 3시가 조금 넘은 시각. <한겨레> 편집국에는 그의 목소리가 퍼졌다. 국민의힘 대선후보 경선 결과가 나온 직후였다. 정권교체를 힘주어 말하고, 존경하고 사랑하는 국민 여러분을 수차례 외치는 윤석열 후보의 얼굴 위로 오로지 한가지 문구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성폭력 무고죄 처벌 강화’.
지난달 21일 윤석열 후보는 당내 경선을 거치며 청년 정책을 내놓았다. 세부 정책 가운데 하나, ‘성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성폭력처벌법)에 무고죄를 신설하겠다고 했다. “강력 범죄 무고의 경우 선고형을 3년 이상의 유기징역으로 조정하겠다”고도 했다. 눈과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정책을 내놓고 “우리 당은 청년들의 지지를 받는 정당으로 거듭났습니다”라고 대선 후보가 되어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참 믿을 수 없는 2021년 대한민국의 이야기.
시간을 되돌려 2019년 7월. 대검찰청에서 두가지 일이 있었다. 먼저 ‘성폭력 무고의 젠더 분석과 성폭력 범죄 분류의 새로운 범주화’라는 포럼이 열렸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윤 후보는 검찰총장이 됐다. 포럼에서는 대검찰청과 한국여성정책연구원이 성폭력 무고죄에 대한 통계를 분석해 그 결과가 발표됐다. 2017~2018년 검찰의 성폭력 범죄 사건 처리 인원수는 7만1740명. 이에 견줘 성폭력 무고죄로 기소된 피의자 수는 약 556명, 성폭력 범죄 사건 처리 인원수의 0.78%. 대검찰청은 윤 후보 캠프 쪽이 ‘거짓말 범죄’라 일컫는 무고죄의 수사가 피해자에 대한 2차 피해를 가중할 수 있다고 보고 수사 매뉴얼까지 바꾸기도 했었다. 윤 후보는 검찰총장이 되기 전엔 서울중앙지방검찰청장을 지냈으니, 검찰의 이런 변화를 몰랐다는 변명은 통하지 않는다.
사람에게 충성하지 않고, ‘국민’에게 충성한다는 그에게 묻는다. 2차 피해를 보지 않고 성폭력 피해 사실을 말하기가 어려운 이 대한민국의 현실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법적 대응을 포기하는 ‘국민’이 있다는 사실을 아는지. 성폭력 범죄자에 의한 성폭력 무고죄 피고소인 ‘국민’ 가운데 84.1%는 기소조차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아는지. 2019년 ‘여성’이라는 ‘국민’ 가운데 강간·강제추행 같은 신체적 성폭력을 당했다고 응답한 비율(2019 성폭력 안전실태조사)이 대검찰청이 파악한 강간·강제추행 발생률(대검찰청 범죄분석)보다 18.5배나 많은 사실을 아는지. 성폭력처벌법 내 무고죄 신설, 무고죄 처벌 강화가 실현됐을 때 가뜩이나 높은 성범죄 암수율(드러나지 않은 범죄 비율)이 더 높아질 수 있는 건 내다봤는지.
윤 후보 쪽의 청년 정책을 보고 환호했던 이들의 생각은 정말 궁금하다. 성폭력 무고죄 신설·강화가 우리 청년의 삶, 노동, 안전, 미래에 한줄기 희망이 될 만한 정책이라고 생각하는지 말이다. 만약 희망이 될 정책이라면 그 희망은 도대체 누구의, 어떤 희망이라고 생각하는지도.
여러 정당에 요청한다. 이 시대의 ‘성인지 감수성’을 적어도 한국 사회, 국민의 기본적인 수준만큼은 갖춰주기를. 그 수준은 몇몇 정책에서 읽히는 수준만큼 낮지 않다. 그리고 당신들이 존경하고 사랑하는 국민 가운데엔 ‘마리’와 같은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제발 좀 잊지 않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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