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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유레카] 대통령의 노래 / 정혁준

등록 2021-11-08 15:46수정 2021-11-09 11:22

‘저들에 푸르른 솔잎을 보라/ 돌보는 사람도 하나 없는데’.

2002년 16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노무현 새천년민주당 후보는 선거 광고에서 직접 통기타를 치며 ‘상록수’를 불렀다. 김민기의 심연함, 양희은의 청아함은 없었다. 대신 노무현의 투박함은 살아있었다. 그 하나만으로도 감동을 주기엔 충분했다.

‘상록수’는 가난 때문에 결혼식을 올리지 못하고 사는 노동자들을 위해 김민기가 작사·작곡한 결혼식 축가였다. 양희은이 1979년 이 노래를 ‘거치른 들판에 푸른 솔잎처럼’이라는 제목으로 처음 발표했다. 서정적인 노래였으나, 엄혹한 군사독재시대에 금지곡이 되는 바람에 ‘아침이슬’과 더불어 대표적인 민주화의 노래가 됐다. 금지곡에서 해제된 뒤 1993년 김민기가 제목을 ‘상록수’로 바꿨다.

부산지역 대표적인 인권변호사였던 노무현 후보는 시위학생과 노동자를 변호하는 과정에서 민중가요를 많이 알게 됐다. 어쩌면 그는 좀 더 ‘쎈 노래’를 부르고 싶었을지 모르겠다.

대선을 한 달 남겨 두고, 노무현 후보는 서울 대학로 호프집에서 열린 문화예술인 간담회에서 ‘상록수’를 불렀다. 앙코르가 터져 나왔다. 이에 노 후보는 “요새 제가 노래를 하고 싶은데, 카메라에 잡히면 과격하다는 이미지로 비쳐서요. 그래도 하나 할게요”라며 노래를 부르려고 했다. ‘과격한 이미지’를 우려한 보좌진이 옆에서 ‘사랑으로’를 청했다. 노 후보는 “과격할까 봐 (보좌진이) 지금 말려요”라며 웃었다. 그러고는 “제가 하고 싶은 노래는요”라면서 오른손을 흔들며 힘차게 노래한다.

‘사람 사는 세상이 돌아와/ 너와 내가 부둥켜안을 때’로 시작하는 민중가요 ‘어머니’였다. 노무현 대통령이 가장 좋아한 노래였다. 노무현 정부의 슬로건인 ‘사람 사는 세상’이 바로 이 노래 가사 일부다. 그의 자서전 <운명이다>에도 이 노래가 나온다. “1980년대 수많은 민중가요 중에서도 ‘어머니’라는 노래가 특히 좋았다. ‘사람 사는 세상’이라는 말이 마음에 와 닿았다. 정치에 입문하면서부터 이 노래 첫 구절 ‘사람 사는 세상’을 꿈으로 삼았다.”

그는 1987년 6월18일, 부산지역 민주화 시위가 절정에 이르던 날에도 이 노래를 불렀다. 군병력이 투입된다는 소문이 나올 정도로 엄중한 상황에서 누군가 ‘어머니’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그는 “노래를 부르면서 걸어가는 청년들의 뒷모습을 보면서 함께 걸었습니다. 왈칵 눈물이 쏟아졌습니다. 그들이 자랑스러웠습니다”라고 당시를 회고하곤 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기득권 세력과 다르게 살게 된 게 ‘거리의 노래’를 배웠기 때문이라고 했다. “제가 80년대 노래를 얼추 다 압니다. 그렇게 노래하면서 용기도 났고, 길거리에 나가 최루탄에 맞서고 했습니다. 제가 다른 변호사나 어른들하고 좀 다르게 직접 길거리에 나갔던 것은 노래를 배웠기 때문에, 아마 (거리로) 나갈 수 있었던 거라고 생각합니다.”

최근 예능 프로그램에서 여야 대선 후보가 나와 애창곡을 불렀다. 개인적인 경험이 묻어난 노래였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후보는 9월26일 방송된 예능 프로그램 <집사부일체>(SBS)에서 하남석의 ‘밤에 떠난 여인’을 불렀다. 다소 의외였다. 대선 후보답게 뭔가 폼나고 정치적인 의도를 담은 노래가 아니었다.

이 후보가 고무공장에서 소년노동자로 철야하며 일할 때 배운 노래였다. 그는 “철야 작업을 많이 했는데 통금이 있어서 (새벽) 4시까지는 못 움직이니까 작업대에서 누워서 잤다. 그때 2살 정도 어린 강원도 친구가 있었는데 이 노래를 가르쳐 주었다. 내가 처음 배운 유행가였다”고 했다.

‘밤에 떠난 여인’은 하남석이 1974년 유니버설레코드에서 발매한 데뷔 앨범 타이틀 곡이다. 이 노래는 작곡가 김성진이 결핵에 걸려 요양을 떠나는 여자 친구와 기차역에서 헤어질 때의 추억을 담고 있다. 신중현은 2015년 발매한 연주 시디(CD) <신중현의 경음악 걸작선>에 연주곡으로 이 노래를 실었다.

윤석열 국민의힘 후보는 9월19일 같은 프로그램에 나와 이승철의 ‘그런 사람 또 없습니다’를 불렀다. 의외였다. 무소불위의 검찰을 개혁하려 한 노무현 전 대통령과 검찰 권한을 최대한 보여준 윤석열 후보는 결이 달랐기 때문이다. 윤 후보는 애창곡에 대해 “대구지검에 있을 때 2009년 5월23일 노무현 전 대통령이 돌아가셨다. 그때부터 이 노래를 많이 불렀다”고 했다.

‘그런 사람 또 없습니다’는 이승철의 2009년 10집 수록곡으로, 영화 <슬픔보다 더 슬픈 이야기> 테마곡으로도 나왔다.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당시 추모곡으로 널리 불렸다. 유튜브에서 볼 수 있는 추모 영상에도 이 노래가 자주 쓰인다. 이승철은 2018년 5월 노 전 대통령 서거 9주기 추도식에서 이 노래를 불렀다.

대선 주자의 애창곡을 들으면서 노무현 전 대통령의 노래가 떠오른다. 그가 언론과 이념의 눈치를 보지 않고 좋아한 노래를 맘껏 불렀으면 어땠을까? 노래는 누군가 있을 때보다 없을 때 더 그 사람을 그리워지게 만든다. 문득 김광석의 ‘부치지 않은 편지’를 듣고 싶다.

정혁준 문화부 기자 jun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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