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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세상읽기] 정치인의 농담

등록 2021-11-10 18:28수정 2021-11-11 02:33

손아람|작가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노동당은 정당 지지율 13%를 얻어 선전했다. 막 의원 배지를 단 노회찬의 공개 강연에서 한 학생이 물었다. “한나라당에서는 앞으로 한나라당과 민주노동당의 좌우 양당 구도가 펼쳐진다 하고, 열린우리당은 열린우리당과 민주노동당의 좌우 양당 구도가 된다고 합니다. 의원님 생각은 어떻습니까?” 노회찬은 대답했다. “미래란 섣불리 예견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양쪽의 의견을 종합해볼 때, 민주노동당과 X의 양당 구도가 될 것은 틀림이 없어 보입니다.” 사상 최초로 원내에 진출한 군소 정당의 새내기 의원이 하는 말이었다. 요란한 폭소가 장내를 뒤덮었다. 한나라당 지지자와 열린우리당 지지자도 함께 웃었을 것이다.

10년이 더 흘러 그를 사석에서 만났다. 진보 정당의 의석은 쪼그라들었고, 민주노동당은 아예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으며, 박정희 대통령의 딸이 다시 청와대를 차지한 때였다. 과거를 환기하며 이게 대체 어떻게 된 거냐고 물었다. 그는 해야 할 말을 한 것이라 했다. 해야 할 말…. 나는 아주 오랫동안 진보 정당이 집권하는 모습을 보리라 기대했고, 그때마다 “민주노동당과 X”라는 노회찬의 농담을 떠올리곤 했었다. 현실적인 근거를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그 농담을 듣던 순간의 유쾌한 기분을 잊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정치인이 해야 할 말이 맞았던 것이다.

노회찬은 특별했다. 더 진보적이거나 더 열정적이거나 더 똑똑하다면 몰라도 언어적 자질로 비견할 정치인은 앞으로도 만나기 어려울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사람들은 그의 언어가 따뜻하고 구수하다고 평가했지만, 내가 듣기에는 무엇보다 영리했다. 그의 언어는 마치 서울 태생 작가가 쓴 소설 속 인물이 구사하는 토속어처럼 예리하게 계산된 구조물이었다. 거북함을 알았기에 피해 갔고, 즐거움을 알았기에 놓치지 않았다. 목표가 분명했기에 농담 속에도 늘 뼈를 숨겨두었다. 농담의 진실됨이란 뭘까. 그게 사실로부터 멀다는 데 있지 않을까? 사실은 단어와 숫자 몇개로 조작할 수 있지만 농담은 순전히 창조되어야 한다. 우리는 농담 속에서 발화자가 고른 어휘와 개념들을 본다. 그것들이 머릿속에서 조직되는 방식을 추측한다. 그게 그 사람이라고 결론 내린다. 그저 농담일 뿐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맞다. 농담일 뿐이다. 그가 평생에 걸쳐 선택하고 쌓아 올린 세계관이다.

대통령 후보 경선 과정에서 정책이 실종되었다고들 한다.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다. 사람들은 언제나 언어로 후보들을 평가해왔다. 실언과 망언을 꼼꼼히 수집하고 명언에 열광한다. 국민의힘 경선에서 젊은 세대는 정치 신인 윤석열 전 검찰총장을 구태의 축으로 몰아붙이고 원로급 정치인이 된 홍준표 의원에게 열광했다. 그렇게 느끼는 이유를 자세히 들어도 선뜻 이해할 수는 없을 것이다. 홍준표 의원이 지난 대선과 달라진 점은 더 팽팽해진 피부와 더 젊어진 언어밖에 없다. 어쩌면 젊은 세대가 홍준표 의원의 공격적이고 신랄한 언어에서 자신을 닮은 기질을 읽어냈던 것인지도 모른다. 처음엔 윤석열 후보에게 기대했던 무언가를.

홍준표 의원은 지지 세력 대신 응원단을 등에 업고 경선을 치렀다. 대통령 선거도 결국 비슷하게 흘러갈 분위기다. 조직폭력배와 연루시켜 흠집을 내려는 시도가 이재명 전 경기도지사에게 어떤 타격을 주었는지 보라. 아무도 놀라지 않는다. 이 전 지사의 언어에서 이미 어떤 느낌을 읽어내고 있기 때문이다. 지지자들은 그가 ‘조폭처럼’ 거침없이 정책을 수행할 수 있는 강한 사람이라고 확신한다. 사람들은 정책 선거가 바람직하다고 말하지만, 정책이 유권자의 취향보다 앞선 선거는 거의 본 적이 없다.

범람하는 정보보다는 구사하는 언어, 내용보다는 스타일. 그런 기준의 투표가 바람직하지 않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거기에 영향을 받지 않을 수는 없다. 유감스럽게도, 내 취향의 언어는 아직 들려오지 않는다. 나는 따뜻하고 세련된 언어 감각을 가진 정치인이 좋다. 정치를 모르더라도, 경제를 모르더라도, 저 사람이 대통령인 나라는 지금보다 괜찮은 곳일 거라 믿게 만드는 유머 감각을 갖춘 정치인을 보고 싶다. “오피스 누나? 제목이 확 끄는데요”와 개에게 ‘사과’를 던져주는 사진 사이에서 우열을 논하는 선거는 너무 슬프다. 그런 농담이 어떤 사실을 드러내기 때문이 아니라, 정치인 자신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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