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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김봉규의 사람아 사람아] 장사 치르지 못한 죽음

등록 2021-11-16 16:42수정 2021-11-17 02:32

제노사이드의 기억 아프리카 르완다 _04
평소 맡아보지 못한 독특한 냄새에 시각보다 후각이 먼저 반응했다. 몇초가 더 흐른 뒤에야 내 두 눈은 ‘이게 뭐지’라며 하얀 석회로 처리된 미라들을 천천히 스캔하기 시작했다. 너무 낯설고 이해하기 어려운 광경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희생자 미라들은 예를 갖춰 모셔졌다기보다 나무 탁자 위에 ‘전시’된 듯했다. 누가 누구인지 알 수 없게 서로 뒤엉킨 상태였다. 생후 1개월 만에 숨진 어린 미라는 꽃병이 있는 작은 책상에 따로 놓였다.

르완다 무람비 제노사이드 기념관은 희생자 848구를 미라 상태로 보관하고 있다. 무람비/김봉규 선임기자 bong9@hani.co.kr
르완다 무람비 제노사이드 기념관은 희생자 848구를 미라 상태로 보관하고 있다. 무람비/김봉규 선임기자 bong9@hani.co.kr

르완다는 대량학살이 발생한 전국 6곳에 제노사이드 기념관(Genocide memorial)을 세웠다. 그 가운데 희생자 미라가 보관된 무람비(Murambi) 제노사이드 기념관을 2014년 4월16일에 찾았다. 기념관 입구 공터에서 동네 아이들 서너명이 흙장난을 치며 놀고 있었다. 아이들은 카메라를 든 나를 경계하는 눈초리였다. 붓으로 쓴 간판은 낡고 초라해 보였으나, 마당 한쪽 기다란 깃대에 조기를 걸어 희생자들을 애도하고 있었다.

무람비 기념관은 학살이 발생하기 전에는 기술학교였다. 주변은 온통 산골이었다. 후투족 민병대가 공격을 해오자 산속에서 화전민처럼 살던 투치족 사람들은 마을에서 제일 큰 시설인 기술학교로 모이기 시작했다. 후투족의 손도끼와 칼바람을 피해 학교로 피신한 투치족은 여럿이 함께 있으면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이란 희망을 품었지만, 후투족 민병대와 경찰은 마치 토끼몰이 하듯 2주간에 걸쳐 학교로 들어가는 모든 음식을 차단하고 수도관을 끊어버렸다.

1994년 4월18일 저녁 후투족이 투치족에 대한 첫 공격을 시작했다. 투치족은 학교 안에 있는 돌과 벽돌을 이용해 몇번에 걸쳐 공격을 막아냈으나, 사흘 뒤 이른 아침 총과 수류탄으로 무장한 후투족의 무차별 공격은 달리 막아낼 방법이 없었다. 투치족이 빠져나갈 수 없게 후투족 일반 시민까지 학교 외곽을 에워싸고 공격에 동참했다. 극적으로 탈출에 성공한 투치족 사람들은 인근 성당에 숨어들었지만, 후투족 민병대는 그 성당마저 공격해 모두 죽였다. 무람비 기념관 누리집은 이곳에서만 5만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고 단 34명만 살아남은 것으로 추정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르완다 정부는 이듬해인 1995년 9월, 희생자들의 유해를 수습했다. 촘촘히 쌓인 시체 더미 안쪽 깊숙한 곳에서 공기가 차단된 탓인지 썩지 않은 시신이 발견되었다. 기념관은 부패하지 않은 시신 848구를 따로 수습해 미라로 만들었다.

기념관 관리인에게 “희생자 미라를 볼 수 있겠느냐?”라고 물었더니, “(수도) 키갈리로 돌아가서 문화부 장관의 직인이 있는 촬영 허가장을 가지고 오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나는 “허가장을 받아 오려면 절차와 시간이 오래 걸리는데, 며칠 내로 한국으로 돌아가야 한다”며 두 손을 모아 간절하고 애절하게 부탁을 했다. 관리인은 “꼭 봐야만 하겠나? 섬뜩할 텐데”라며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이내 “그래! 마음껏 봐라”라고 말하며 미라가 있는 수십개의 교실 열쇠 뭉치를 건네줬다. 그와 동시에 플라톤의 <국가> 중 한 대목 “빌어먹을 이놈의 눈, 그래 실컷 봐라”라는 문장이 다시 한번 머리를 스쳤다. 순간 망설였지만, 주저할 시간이 없었다.

첫번째 교실 문이 열렸다. 평소 맡아보지 못한 독특한 냄새에 시각보다 후각이 먼저 반응했다. 미라로 만드는 데 사용한 약품과 아직도 남아 있는 시신 특유의 냄새가 함께 뒤섞여 있었다. 몇초가 더 흐른 뒤에야 내 두 눈은 ‘이게 뭐지’라며 하얀 석회로 처리된 미라들을 천천히 스캔하기 시작했다. 너무 낯설고 이해하기 어려운 광경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희생자 미라들은 예를 갖춰 모셔졌다기보다 나무 탁자 위에 ‘전시’된 듯했다. 누가 누구인지 알 수 없게 서로 뒤엉킨 상태였다. 대다수 미라는 사망 직후 바로 약품 처리한 것이 아니어서 겉가죽만 바싹 말라붙은 모습이었다.

생후 1개월 만에 숨진 어린 미라는 꽃병이 있는 작은 책상에 따로 놓였다. 꽃병에는 붉은색 조화가 꽂혔고, 아이의 죽음과 관련한 추모글이 옆에 적혀 있었다. ‘어린 아가야 곤히 잠들거라 하늘에서 엄마 품에…’라는 르완다 말을 나는 어설프게 영어로 전해 들었다. 교실 창틀은 비닐 재질의 형형색색 천막으로 가려져 있었다. 햇볕을 차단하기 위한 것으로 보였다. 오래 머물 수 있는 시간이 없어 몇개의 교실만 들여다보고 문을 닫아야 했다.

대량학살 당시의 참상과 아픔의 역사를 후세에 보여주고 기억하려는 의도는 알겠으나, 억울하게 숨진 희생자를 화장하거나 매장하지 않고 굳이 미라 형태로 보관하는 그들의 속내를 이해하기 어려웠다. 나는 지금도 무람비 제노사이드 기념관의 희생자 미라를 떠올리면, 하루빨리 그들이 흙으로 돌아갈 수 있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가득하다.

김봉규 사진부 선임기자. 다큐멘터리 사진집 <분단 한국>(2011), <팽목항에서>(2017)를 출간했다. 제주 4·3 학살 터와 대전 골령골을 비롯해 전국에 흩어진 민간인 학살 현장을 서성거렸다. 안식월 등 휴가가 발생하면 작업 지역을 넓혀 캄보디아 ‘킬링필드’를 비롯한 아시아, 폴란드 전역과 독일, 네덜란드, 체코, 오스트리아 등 나치 시절 강제 및 절멸 수용소 등을 15년 넘게 헤매고 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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