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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김봉규의 사람아 사람아] 살아남은 자들의 울부짖음

등록 2021-11-30 18:21수정 2021-12-01 02:31

제노사이드의 기억 아프리카 르완다 _05
추모식이 시작하기도 전에 벌써 몇몇 추모객의 큰 눈망울에는 눈물이 가득 고여 있었다. 카가메 대통령의 추모사가 이어지자 경기장을 가득 메운 대량학살 피해자 유가족들은 복받쳐 오르는 슬픔을 견디지 못하고 여기저기서 흐느끼기 시작했다. 한 사람이 서럽게 혹은 구슬프게 흐느끼면, 그 주변 사람들은 울부짖으며 부들부들 떨다가 실신하기도 했다.

르완다 대량학살에서 살아남은 생존자와 희생자 유가족들이 2014년 4월7일 수도 키갈리 아마호로 경기장에 모여 희생자를 추모하고 있다. 키갈리/김봉규 선임기자
르완다 대량학살에서 살아남은 생존자와 희생자 유가족들이 2014년 4월7일 수도 키갈리 아마호로 경기장에 모여 희생자를 추모하고 있다. 키갈리/김봉규 선임기자

르완다는 매년 4월7일부터 제노사이드 추모 기간을 갖는다. 1994년 그날을 시작으로 100일 동안 모두 100만명이 숨진 비극을 잊지 않기 위해서다. 첫 일주일 동안은 추모 주간으로 설정해 수도 키갈리를 비롯한 전국의 학살터 곳곳에서 추모식을 연다. 그 뒤에도 100일이 되는 7월 중순까지 일상 근무와 각종 추모 행사를 병행하는 추모 기간을 이어간다.

르완다 대량학살 20주기 추모식이 열린 2014년 4월7일, 수도 키갈리에서 규모가 제일 큰 종합경기장인 아마호로(Amahoro) 경기장 입구에 이른 아침부터 유가족과 진행 요원들이 속속 모여들었다. 운동장은 이미 추모객들로 가득 차 있었다. 추모식장에 들어가는 것은 생각보다 훨씬 어렵고 절차가 복잡했다. 과거 3년 정도 청와대를 출입할 때 우리나라 대통령뿐만 아니라 세계 각국 정상을 코앞에서 취재하면서 별의별 보안 검색을 받아보았지만, 그 어떤 브이아이피(VIP) 근접 취재보다 이날 추모식장 입장이 까다로웠다. 특히 취재 장비가 많은 방송 취재진과 사진기자들의 출입이 어려웠다. 미국 백악관을 들어갈 때보다 더 세밀하게 최첨단 금속탐지기와 엑스레이 보안 검색 등을 거쳐야 했다. 전날 르완다 대통령 대변인실과 경호팀으로부터 특별 주의사항을 전달받았다. 휴대전화는 호텔 침대 베개 밑에 넣어두고 아예 가지고 오지 말라는 것이었다. 설령 전원이 꺼졌다 할지라도 휴대전화를 지니고 있으면 아예 출입 자체가 안 된다고 했다. 휴대전화가 폭탄테러의 원격 조종장치로 이용될 수 있기 때문이란다. 아프리카 지역의 잦은 테러를 떠올리면 이해 못할 바는 아니었다.

추모식에 앞서 유럽 각국의 정상 및 대표급 인사들과 부룬디, 우간다 등 아프리카 동맹국 정상이 잇따라 귀빈석을 채웠다. 반기문 당시 유엔 사무총장도 사회자의 안내로 일어서서 손을 흔들며 추모객들에게 인사했다. 이어서 르완다의 폴 카가메 대통령이 들어서면서 비로소 행사가 시작되었다.

광각렌즈로 한꺼번에 여러 사람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는데, 뷰파인더 속 표정이 하나같이 어두워 보였다. 추모식이 시작하기도 전에 벌써 몇몇 추모객의 큰 눈망울에는 눈물이 가득 고여 있었다. 카가메 대통령의 추모사가 이어지자 경기장을 가득 메운 대량학살 피해자 유가족들은 복받쳐 오르는 슬픔을 견디지 못하고 여기저기서 흐느끼기 시작했다. 한 사람이 서럽게 혹은 구슬프게 흐느끼면, 그 주변 사람들은 울부짖으며 부들부들 떨다가 실신하기도 했다. 경기장은 금세 통곡의 울음바다로 변했다. 진행 요원들은 기절하는 사람들을 밖으로 실어나르기에 정신없었다. 추모식에 참가한 생존자 중엔 피바람이 몰아치던 날 급히 집 근처 화장실이나 창고로 몸을 피했지만, 나머지 가족들은 칼과 도끼로 살해당하는 모습을 숨죽이며 바라만 봐야 했던 사람도 있었다. 학살의 광기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이다.

죽은 자들을 애타게 부르는 산 자들의 울부짖음을 사진과 글로 기록하고자 했으나 그들의 슬픔과 절규를 온전히 담아내기란 불가능했다. 카메라 셔터를 누르거나 수첩에 뭔가를 끼적거리는 시간보다, 그냥 사진기를 어깨에 멘 채 멍하니 서서 그들을 바라보는 시간이 더 길어졌다. 그들을 끌어안고 슬픔이라도 나누고 싶었지만, 이방인인 나는 쉽게 다가서지 못했다.

오전 8시부터 시작된 추모식은 해가 지고 나서도 계속되었다. ‘평화’라는 뜻의 아마호로 경기장 조명탑에 하나둘 불이 켜지자 불빛을 찾던 나방이 사방에서 날아들었다. 영면에 이르지 못해 구천을 떠도는 희생자의 넋이었을까, 잠시 착각에 빠져 그 광경을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어둠이 찾아왔을 때 추모객들은 미리 준비해온 촛불을 켜기 시작했다. 적도에 위치한 아프리카의 르완다도 저물녘엔 제법 쌀쌀해졌다. 작은 촛불이었지만 따뜻한 온기가 살아남은 자의 슬픔을 어루만지고 보듬는 듯했다. 그 온기는 촛불에 초점을 맞춘 카메라 렌즈를 지나 차가워진 내 뺨에도 다가와 머물렀다. 추모식은 밤이 깊어져 조명탑 근처 나방들이 사방으로 흩어질 무렵 마무리되었다. 끝까지 자리를 떠나지 않은 추모객들은 시내 방향으로 행진을 시작했다. 어두운 밤이 지나고 아침이 온들 산 자의 뼈에 사무친 기억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김봉규 | 사진부 선임기자.

다큐멘터리 사진집 <분단 한국>(2011), <팽목항에서>(2017)를 출간했다. 제주 4·3 학살 터와 대전 골령골을 비롯해 전국에 흩어진 민간인 학살 현장을 서성거렸다. 안식월 등 휴가가 발생하면 작업 지역을 넓혀 캄보디아 ‘킬링필드’를 비롯한 아시아, 폴란드 전역과 독일, 네덜란드, 체코, 오스트리아 등 나치 시절 강제 및 절멸 수용소 등을 15년 넘게 헤매고 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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