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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다양한 지방정부에 대한 상상

등록 2021-12-07 17:04수정 2021-12-08 02:32

[세상읽기] 서복경ㅣ더가능연구소 대표

12월1일은 내년 지방선거 6개월 전이었다. 법에 따르면 기초의회 선거구획정위원회가 선거일 6개월 전까지 선거구획정안을 시·도지사에게 제출해야 하고 의회는 이를 받아 조례를 개정해야 하는데, 이날 현재 선거구획정안이 의회에 상정된 건 서울시밖에 없었다. 내년 지방선거를 준비하는 후보자나 선거권자도 오리무중 선거구 때문에 상당 기간 혼란을 겪을 모양이다.

그런데 내년 1월 시행 예정인 지방자치법 제4조(지방자치단체의 기관구성 형태의 특례)에는 이런 혼란을 막을 수 있는 중요한 내용이 들어 있다. 주민들이 투표로 지방정부와 지방의회의 구성을 다양하게 선택할 수 있게 한 것이다. 이를 “따로 법률이 정하는 바에 따라” 진행하도록 해놓았는데, 그 법은 아직 제정되지 않았다. 시민들의 상상력이 더해진다면 제정될 법도 풍부해지고 지방정치도 과거에 없던 다양한 모습으로 변할 수 있지 않을까?

지금은 모든 지방정부의 장을 1위 대표제로 뽑고, 모든 지방의회는 국회의원 선거구 범위 내에서 정해주는 지역구 의석과 쥐꼬리만 한 비례대표 의석으로 구성해야 한다. 그러다 보니 국회의원 선거구 획정이 늦어지면 지방의회 선거구 획정도 늦어져, 결국 선거권자들은 후보가 누군지 제대로 알지도 못한 채 선택을 해야 했다. 그런데 시·군·구마다 지방정부 구성이 다양해진다면 그럴 필요가 없어진다.

상상해보자. 내가 사는 동네의 전체 지방의회 의원을 비례대표로 구성한 뒤 지방의회에서 지방정부의 장을 선출한다면? 시·군·구가 넓으면 몇개의 생활권역으로 선거구를 나누면 된다. 선거구를 몇개로 나눌 것인지는 주민투표로 결정할 수 있다. 정당들은 선거구별로 5~10명 이내의 후보 이름을 실은 명부를 제출하고, 주민들은 그 당에 투표하거나 혹은 그 명부에 들어 있는 후보를 선택할 수도 있다. 정당명부에서 가장 높은 지지를 얻은 후보자를 시장이나 군수, 구청장으로 선출하라고 지방의회에 요구할 수도 있다.

시·군·구청장 결선투표제를 도입하는 건 어떤가? 30% 표를 얻은 시장·군수·구청장이 아니라, 51%를 얻는 시장이나 구청장을 만들면 좀 더 다양한 주민들의 의견이 반영될 수 있지 않을까? 후보들은 1차 투표에서 얻은 표를 기준으로 51%를 넘기기 위해 합종연횡을 하고, 아마 서로 다른 정당끼리 연립정부를 구성할 수도 있을 것이다. 정당법을 바꾸어 전국이 아니라 우리 동네에서만 활동하는 정당을 허용한다면, 동네 정치 지형은 더 풍부해질 것이다. 전국 정당 1개와 우리 동네 정당 1~2개가 연립정부를 구성하고, 같이 4년의 시정이나 구정을 운영하게 한 뒤, 다음 선거에서 평가받게 하면 된다.

읍·면·동 대표를 동네에서 선출한 다음 시·군·구의회 의석의 절반을 차지하게 해서 동네의 구체적인 현안을 대표하게 하고, 나머지 절반은 전체 시·군·구를 선거구로 하는 비례대표제로 뽑는 건 어떨까? 비례대표로 뽑힌 의원들은 해당 시·군·구 전체를, 읍·면·동 선출 대표자들은 좀 더 작은 범위의 세밀하고 구체적인 이해를 대변하게 하는 거다. 이러자면 지금보다 시·군·구의회 의석이 좀 더 늘어나야겠지만, 적정한 의석수를 주민들이 투표로 정해주면 된다.

이 밖에도 다른 나라의 사례들을 보면 무수한 경우의 수를 찾아낼 수 있다. 그저 하는 헛소리가 아니다. 지금 우리 사회엔 더 다양한 정치적 상상력이 절실하다. 코로나19가 터졌을 때 ‘드라이브 스루’를 정부 단위에서 처음 채택한 건 중앙정부가 아니라 고양시였다. ‘마스크 대란’이 나서 중앙정부가 5부제를 돌릴 수밖에 없었을 때, 논산시는 동네 기업과 연계해 800원 마스크를 모든 주민에게 공급했다. 작년 봄 중앙정부와 국회가 재난지원금을 가지고 3개월여 동안 50%, 70%, 100% 논쟁을 하고 있을 때, 전주시는 시 재정으로 재난지원금을 지급해버렸다.

중앙정부나 국회가 무능하다는 게 아니다. 정부는 규모가 클수록 결정의 과정이 길고 합의해야 하는 주체들이 많아 결정이 느릴 수밖에 없다. 지금처럼 감염병 재난과 기후위기, 사회적 불평등으로 인한 돌봄 사각지대가 예측할 수 없이 빈발하는 때에는 동네 상황을 잘 알고 지역사회 자원을 연계하여 조금 더 빨리 대처할 수 있는 지방정부의 대응력이 절실히 필요하기 때문이다. 동네마다 지방자치법 4조 상상단을 꾸려보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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