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연 | 젠더팀장
2021년 젠더 뉴스 홍수 속에 단 하나의 열쇳말을 꼽으라면 ‘죽음’을 꼽을 수밖에 없다. 지난해 말부터 시작해 너무 빠른 속도로 늘고 있는 20대 여성의 자살과 자살시도라는 현상에 이 사회가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5월에는 공군 내 성폭력의 피해자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8월 내내 의붓아버지·손자·지인 등이 여성을 살해한 사건의 보도가 이어졌다. 연말도 잠잠할 새 없었다. 11월 스토킹 때문에 신변보호를 받던 피해자가 결국 스토킹 가해자가 휘두른 흉기에 찔려 사망했다. 그로부터 22일 뒤 신변보호를 받던 사람의 가족이 살해당했다.
기사에 나올 정도로 심각하고 드문 사건을 부풀려 말하지 말라고들 한다. 드문 죽음을 일반화하지 말라고 한다. 이것은 부인하거나, 일반화 여부를 따져야 할 문제가 아니다. ‘죽음’이라는 감각이 삶에, 일상에 얼마만큼 가까운가에 대한 문제이다.
5년 전 일이다. 한 사건의 피해자가 되었다. 사건이 있고 1년쯤 지나 남성 가해자가 풀려났다. 이즈음이었다. ‘죽음’이라는 감각이 내 삶 깊숙이 자리 잡았다. 나는 피해를 증명하고, 증언했을 뿐이었다. 그런데도 ‘죽음’을 떠올리는 건 너무 자연스러웠다. 무방비의 여성 피해자가 남성 가해자의 공격을 받아 죽었다는 ‘전형’은 2021년만의 일이 아니었으니까. 그것은 내내 이어진 여성들의 이야기이니까. 2016년 강남역 여성살인 사건은 나의 공포심을 자극한 사건이었다. 집으로 가는 길엔 항상 어떤 공격을 대비했다. 부풀려진 공포 아닐까, 내가 상상력이 너무 풍부한 걸까. 질문하면 사회는 이내 답했다. 아니, 부풀려지지 않았어. 내 상상력을 뛰어넘는 잔인한 여성살해 사건은 가끔 그리고 쉼 없이 세상에 알려졌다. 결국 이사를 했다. 5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공격을 받을 수 있다는 공포와 죽음이 가까이 있을지 모른다는 불안감은 여전히 생생하고 날카롭다.
페미사이드. 남성에 의한 여성살해. 달리 해석할 여지가 없는 이 용어와 정의 앞에서 고개를 들었다 다시 숙이고 애먼 발끝을 쳐다보게 된다. 개인이 경험하는 ‘죽음’이라는 감각이 하나의 사회 현상으로 정리되어 있으니 도망치고 싶었다. 내가 여자라서 목숨을 잃을지 모른다는 건 잠시의 감각과 망상이 아니며, 하나의 현상이자 역사인 셈이니까. 거기에서 완벽히 벗어날 길이란 걸 없다는 걸 깨닫는 때면, 다 잊고 도망이라도 치고 싶은 마음이다. 이렇게 도주의 심정이 일면 다잡듯 책 한권을 꺼내 읽는다.
‘참으로 끔찍한 해였다. 그러나 더욱 끔찍한 건 우리의 망(忘)의 습성인지도 모르겠다. 올해의 10대 뉴스를 접하면 그 치 떨리던 분노와 치욕과 비탄이 하나하나의 사건으로 이미 간결하게 정리돼 있음을 본다. 조만간 망의 서랍 속에 간직하기 위해.’(박완서 산문집 <지금은 행복한 시간인가> 중 ‘불망을 위하여’)
‘망’과 ‘도망’의 질긴 습성을 끊고, 결코 간결하게 정리될 수 없는 일들을 마주 보기로 한다. 바로 보고 잊지 않아야, 이 사회가 수많은 여성의 죽음을 쉬이 잊는 끔찍함으로부터 하루라도 빨리 벗어날 수 있을 거라는 기대 때문이다. <한겨레21> 1393호는 ‘페미사이드 500건의 기록’을 다뤘다. 2016년 1월부터 2021년 11월까지 나온 판결문 3500쪽을 뒤져 여성이 겪는 가장 극단적인 폭력의 형태인 ‘페미사이드’ 사건의 코드를 분석하고, 유형을 파악했다.
판결문 속 사건은 일부다. 미수에 그친, 기록되지 않은, 알려지지 않은 여성살해에 대한 공포와 위협이 여성 개개인의 삶 속에 새겨져 있다. 그 공포를 떨치기 위해 할 수 있고, 해야 하는 건 결국 소리 내 말하기다. 어떤 위협 속에서, 어떻게 살아남았는지 이야기하고, 그래서 그 위협을 어떻게 제거하고, 미래엔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그냥 살아가는 것이 가능할 수 있을지 시끄럽게 이야기해야 한다. 모인 이야기는 여성을 서로 잇는 촘촘하고 단단한 끈이 될 것이다.
xingxing@hani.co.kr
<한겨레21>은 ‘강남역 살인사건’ 이후 벌어진 여성들의 죽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교제살해, 아내살해, 성산업 종사자 살해 등과 관련된 2016~2021년 판결문 500여건을 분석 중입니다. 죽음의 실태를 제대로 기록하지 않는 한, 여성들에겐 어디나 ‘강남역’으로 남을 겁니다.
페미사이드 기록은 <한겨레21> 제1393호(12월20일), 제1394호와 12월 말에 문을 열 특별 웹페이지를 통해 공개될 예정입니다. 이 특별 웹페이지에 독자 여러분의 목소리를 담으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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