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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손석우의 바람] 파사트, 제타, 골프

등록 2021-12-26 18:07수정 2021-12-26 19:06

손석우 | 서울대 지구환경과학부 교수

자동차에 관심이 있다면 한번쯤은 들어봤을 것이다. 바로 폭스바겐(폴크스바겐)의 자동차 이름들이다.

프리미엄 독일 자동차라고 하면 보통 메르세데스-벤츠, 베엠베(BMW), 아우디를 꼽는다. 그런데 이 3사가 생산하는 자동차는 한결같이 무미건조한 이름을 가지고 있다. 메르세데스-벤츠에는 A, C, E, S 등의 클래스가 있다. 베엠베는 1~8시리즈 그리고 X 시리즈 등이 있다. 마찬가지로 아우디는 A, Q, R 시리즈 등으로 구분된다. 그저 알파벳과 숫자를 조합한 암호 같은 이름이다.

그와 달리 폭스바겐의 자동차는 매우 독특한 이름을 가지고 있다.

‘파사트’, 독일어로 무역풍을 뜻한다. 생소한 바람의 이름이다. 무역풍은 아열대에서 중위도에 걸쳐 넓은 지역에 부는 북동풍(북동쪽에서 남서쪽으로 부는) 계열의 바람을 일컫는다. 콜럼버스는 이 바람 때문에 신대륙을 발견할 수 있었다. 만약 무역풍이 없었다면 산타마리아호는 아이티와 쿠바에 결코 도착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물론 당시에는 이 바람의 정체를 알지 못했다. 근대에 들어 유럽과 아메리카 그리고 유럽과 아시아의 해상 무역에 이 바람이 활용됐고 그래서 무역풍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제타’는 무슨 뜻일까? 눈썰미가 있다면 대번에 제트기류에서 이름을 가져온 것을 추측할 수 있다. 제트기류는 중위도 상공 약 10㎞에 발생하는 강한 바람으로 서쪽에서 동쪽으로 분다. 흔히 항공기가 이용하는 바람으로 알려져 있다. 이 바람을 이용하면 한국에서 미국으로 향하는 비행시간을 그 반대 방향보다 거의 2시간 가까이 줄일 수 있다.

해치백 모델인 ‘골프’는 다소 중의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 스포츠 종목에서 이름을 따왔다는 설이 있다. 물론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걸프스트림’에서 따왔다는 설명이 더 정확하다. 걸프스트림은 우리말로는 멕시코만류라 부르는 북대서양 해류다. 미국과 멕시코 사이에 위치한 멕시코만에서 시작해서 플로리다를 거쳐 미국 동부를 따라 흐르는 해류다. 이 해류는 순전히 바람에 의해 만들어진다. 바닷물을 흐르게 하는 그 바람을 따라 ‘골프’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파사트’, ‘제타’, ‘골프’. 모두 바람에서 그 이름을 가져온 것이다. 다른 차들도 마찬가지다. 국내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소형차 ‘폴로’와 ‘보라’ 그리고 단종된 ‘시로코’, 이 모두 바람에서 이름을 따왔다.

‘폴로’는 ‘골프’와 마찬가지로 다소 중의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 흔히 의류 브랜드로 알려져 있지만, 그 브랜드 로고가 보여주듯 폴로는 말을 타고 하는 구기 운동이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북극에서 부는 찬 바람을 의미하기도 한다. ‘보라’는 이탈리아와 크로아티아 사이에 위치한 아드리아해 연안으로 불어오는 건조한 북동풍을 일컫는다. ‘시로코’는 어떨까? 사하라 사막에서 지중해 연안으로 부는 모래바람이다. 그러니까 ‘폴로’, ‘보라’, ‘시로코’는 북극, 지중해, 그리고 아프리카에서 부는 국지적인 바람의 이름을 딴 것이다.

왜 하필 바람일까? 그 많은 자연의 이름들 중에서 폭스바겐은 바람의 이름을 가져왔다. 물론 우연은 아닐 것이다.

학창 시절 국어를 무척 싫어했지만, 아직까지 기억하고 있는 시가 있다. 김춘수 시인의 ‘꽃’. 시험공부를 위해 무작정 외웠던 시를 무려 30년이 지나도록 여전히 기억하고 있다. “(중략)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중략)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보이지 않지만 느낄 수 있는, 존재하지만 결코 그 경계를 가늠할 수 없는, 바람. 폭스바겐은 자사의 자동차가 바람과 같기를 바랐는지 모른다. 그렇게 꽃처럼 특별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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