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민촌으로 꼽히는 서울 강남구 개포동 구룡마을 뒤로 고층아파트 타워팰리스 단지가 보인다. 자산 초양극화에 따른 소득불평등의 현실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세상읽기] 김만권 | 경희대 학술연구교수·정치철학자
거의 2년이다. 코로나19가 인류를 덮치고 우리의 일상을 휩쓸어 버린 지. 그사이 우리에게 가장 친숙해진 용어가 ‘사회적 거리두기’다. 질병관리청에 따르면 사회적 거리두기란 “개인 또는 집단 간 접촉을 최소화하여 감염병의 전파를 감소시키는 공중보건학적 감염병 통제 전략”이다. 우리는 서로를 만나지 않는 것이 서로를 보살피는 일이 되어버린, 감염된 세계에 살고 있다.
그런데 코로나 이전부터 우리는 알게 모르게 ‘사회적 거리두기’를 실천해 왔다. 예를 들어 우리는 ‘가난’에 확진된 사람들과 오래전부터 거리를 두어 왔다. 주변에서 흔히 보듯 사회적으로 부를 이룬 사람들은 이들이 다가서면 가난에 감염이라도 될 듯이 고층 아파트를 짓고 담장을 둘러 자신들만의 세계를 구축한다. 이런 아파트들은 같은 단지 내에서도 임대아파트 주민들과 동선이 겹치지 않도록 경계가 그어진다. 부모들은 아이들에게도 단단히 그 경계를 물려준다. ‘저쪽 애들과 어울리지 마라!’
알고 보면 도시 자체가 그렇다. 세계 곳곳의 수많은 도시가 빈민을 한쪽 지역에 몰아넣고 격리한다. 착한 빈민은 그곳에 모여 살며 정부가 주는 수급이나 감사히 받고 그 외에는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 자들이다. 화려한 소비도시일수록 더 그렇다. 소비에 방해되는 모든 존재는 거리에서 추방되어야 한다. 만족도 높은 소비는 언제나 쾌적한 환경에서 이뤄진다. 소비자의 시선을 불편하게 만든다는 간단한 이유만으로도 노숙자들, 거지들은 ‘소비하는 삶의 거리 안’에 존재해서는 안 된다. 우리가 소비하는 시간 동안 그들은 거리에서 사라져야 한다.
이런 사회적 거리두기는 가끔이나마 어려운 처지를 동정하는 사람들의 태도에조차 스며들어 있다. <가난 사파리>의 저자 대런 맥가비가 지적하듯, 많은 사람이 빈곤을 하나의 사파리처럼 대한다. 빈곤이 문제시될 때마다 사파리의 동물들처럼, 우리를 위협하지 않는 이들,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 이들의 무기력한 삶이 선택적으로 전시되고 잠시 동정의 시선을 끌지만, 이내 우리의 관심은 그 사파리를 떠난다. 근본적으로 이들과 우리는 결코 같은 공간에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곧 해가 바뀐다. 예전 같으면 이맘때 잊힌 ‘가난 사파리’ 방문이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휘발성 관심에 대한 맥가비의 비판이 옳다고 믿으면서도, 그나마 이맘때가 좋았다고 여기는 건 우리가 이들과 멀리 거리를 둬야 할 온갖 변명에서 벗어나 어려운 처지의 삶을 우리의 시선 안에 품기 때문이다. 사회적 시선 밖에서 주목받지 못하는 삶은, 그 실체가 권리이든 존재 그 자체이든 모두 사라지고 만다. 더 심각하게는 타인들이, 사회가 그 존재를 인식하지 못하는 삶은 점점 자신의 눈에도 보이지 않게 된다. 사회적 존재라면 그 누구라도, 타인의 시선에서 의미 있게 존재할 때 자기 존재의 의미를 더 잘 찾아가기 마련이다.
그렇기에 코로나19로 인해 사회의 구석구석까지 스며든 사회적 거리두기는 그렇지 않아도 보이지 않는 곳에 존재하는 사회적 취약계층의 삶에 너무 큰 위협이 되어 왔다. 특히 우리가 겪고 있는 사회적 변화를 볼 때 더욱 그렇다. ‘2020년 인구주택총조사’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1인 가구는 31.7%로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는 가구 유형으로 자리잡았다. 문제는 1인 가구의 빈곤율이 다른 가구 유형보다 훨씬 높다는 것이다. ‘2015년 빈곤통계연보’를 보면 이때 이미 1인 가구의 빈곤율은 다인 가구 빈곤율의 네배에 이르고 있다. 이 외 여러 연구가 보여주듯 ‘가난하다는 것’과 ‘혼자 산다는 것’ 간의 관계는 점점 뚜렷해지고 있다. 현실이 이러하니 이 계층에게 코로나 시대의 사회적 거리두기의 본질은 ‘타인의 시선 밖으로 온전히 사라지는 것’이 되고 만다.
자본주의 사회가 존재하는 한, 빈곤층은 언제나 우리 ‘곁’에 있다. 그동안 우리는 좀 더 빈곤한 자들을 향한 ‘사회적 거리두기’를 꾸준히 실천해 왔다. 하지만 지그문트 바우만의 말처럼 “가난하다는 것의 의미는 ‘곁’에 있는 ‘우리’가 어떤 이들이냐에 따라 달라진다.” 모든 사회적 약자들이 그렇다. 사회적으로 힘이 없다는 의미는 ‘곁’에 있는 ‘우리’가 어떤 이들이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우리가 어떤 이들이냐에 따라 이들은 보이는 존재일 수도, 보이지 않는 존재일 수도 있다. 그래서 묻는다. 우리는 어떤 사람들인가? 나는 어떤 사람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