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네 프랑크는 은신처 다락방 창문으로 바로 앞 높이 85m의 웅장한 서교회를 바라보며 꿈과 희망을 품었으나, 1944년 8월4일 주변의 신고로 발각되고 말았다. 암스테르담/김봉규 선임기자
안네 프랑크는 나치의 유대인 말살 정책을 피해 가족들과 함께 독일에서 당시 중립국이었던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으로 이사한 뒤 한 건물에서 761일 동안 숨어 지냈다. 열세살 생일에 선물로 받은 일기장을 친구처럼 ‘키티’라는 이름으로 불렀고, 1944년 8월4일 주변의 신고로 발각되어 식구 모두 아우슈비츠로 끌려갈 때까지 2년여 동안 은신처에서 <안네의 일기>를 썼다.
나는 ‘안네 프랑크를 찾아서’라는 나름의 루트를 계획하고 암스테르담의 은신처와 강제로 끌려간 폴란드 아우슈비츠, 또다시 언니와 함께 이송되어 생을 마감한 독일 하노버의 베르겐벨젠 수용소까지 더듬어보는 여정을 세웠다. 그 첫 일정으로 2019년 3월 은신처 ‘안네의 집’이 있는 암스테르담을 찾았다.
숙소는 평소보다 3배가량 많은 돈을 지급해야 했다. ‘불금’이었다. 네덜란드는 대마초가 합법인 나라이다 보니 ‘주말이면 주변 국가에서 많은 사람이 몰려들어서’라고 숙소 지배인이 알려주었다. 게스트하우스에선 2층 침대를 배정받았는데 바닥의 카펫은 한눈에 보아도 빈대 등 벌레들이 들끓을 것 같았다. 밖은 주말 저녁을 즐기려는 사람들로 골목길까지 가득 찼다. 잠을 청하려고 잠시 눈을 껌벅이고 있자니 대마초 연기가 록카페의 음악 소리와 함께 창문 틈으로 마구 쏟아져 들어오는데 머리가 어지러웠다. 겨우 눈을 붙였으나 선잠에서 깨어났다. 결국은 빈대에게 물려서 발목이 가렵기 시작했고, 피가 나서야 긁는 것을 멈추었다.
새벽에 카메라를 챙겨서 숙소에서 나와 ‘안네의 집’으로 걸었다. 더는 빈대에게 물리고 싶지 않아서이기도 했지만, 해가 뜨기 직전의 빛을 좋아하기 때문이었다. 그 빛은 어둠 속에 색을 숨긴 어슴푸레한 빛이다. 어제저녁 시끌벅적했던 길거리는 쥐 죽은 듯 조용해졌고, 환경미화원들이 새벽을 열고 있었다.
동트기 전 새들이 어여쁘게 울었다. 오리들의 날갯짓에 잔잔한 수로의 물도 잠에서 깨어나고 있었다. 은신처 ‘안네의 집’ 바로 옆 서교회 종탑에서 15분마다 종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살아생전 안네도 들었던 소리다. 두려움에 떨던 안네에게 위안이 되었을까? 안네가 매일 바라보며 의지하던 큰 교회는 가까이 있었으나 결국은 살아남는 데 도움이 되지 못했다. 이제 와서 교회 한쪽에 작은 동상을 세워 추모하고 있을 뿐이다.
한국에서 온라인으로 ‘안네의 집’ 표를 예약하려고 했으나 일정상 원하는 날짜는 구할 수 없었다. 이메일로 ‘안네의 집’ 박물관 쪽에 언론인이면서 제노사이드 관련 공부하는 사람이라고 보냈더니 원하는 날에 오라는 답을 받았다. 박물관 쪽과 이야기된 시간보다 더 일찍 방문했는데도 주저 없이 바로 입장시켜 주었다. 실내에선 사진 촬영 금지였다. 안네의 아버지 오토 프랑크는 당시에도 취미가 사진 찍기와 활동사진 촬영이어서 안네 프랑크의 사진과 동영상은 생각 외로 풍부하게 존재했다. 2층에서 3층으로 이어지는 계단을 오르니 눈가림용 책장이 보였다. 당시의 진품 책장이라고 ‘건들지 말라’는 주의 문구가 쓰여 있다. 그 책장 뒤로 은신처로 올라가는 입구가 보였다.
은신처 3, 4층에선 안네의 가족을 포함해 모두 8명이 숨죽이며 살았다. 모든 공간의 빛은 어두운 조명으로 사물을 겨우 구분할 수 있을 정도였다. 각 층을 오르는 계단은 매우 가팔랐다. 수세식 좌변기 화장실과 세면대와 거울이 있는 공간도 있다. 4층의 제법 큰 공간에는 난로와 수도가 있었다. 벽에 안네의 일기에서 발췌한 글귀가 쓰여 있었다. “나는 폐에서 탁한 공기를 빼기 위해 거의 매일 아침 다락방으로 간다. 오늘 아침에 내가 거기에 갔을 때 페터가 있었고, 우리 둘은 밖을 내다보았다”고 쓰여 있다. 페터는 사춘기 소녀 안네가 처음으로 우정 이상의 감정을 느낀, 은신처에서 함께 살고 있던 다른 가족의 오빠다. 페터와의 첫사랑의 감정으로 부모와 갈등을 빚기도 했다. 이어서 다락방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나왔는데, 관람객들은 올라갈 수 없었다.
안네는 해가 지고 사람들이 거리에서 사라진 뒤 다락방 작은 창문을 통해서 세상을 바라보았지만, 달빛이 너무 밝은 저녁엔 밖의 사람들에게 발각될까봐 창문도 열지 못했다고 일기에 썼다. 마지막 벽면에는 “내 목소리를 내고, 세계로 나가 인류를 위해 일하겠습니다”란 문구와 “아무에게도 털어놓지 못했던 저로서도 모든 것을 털어놓을 수 있기를 바란다. 1942년 6월12일”이라고 쓰여 있었다.
김봉규, 사진부 선임기자. 다큐멘터리 사진집 <분단 한국>(2011), <팽목항에서>(2017)를 출간했다. 제주 4·3 학살 터와 대전 골령골을 비롯해 전국에 흩어진 민간인 학살 현장을 서성거렸다. 안식월 등 휴가가 발생하면 작업 지역을 넓혀 캄보디아 ‘킬링필드’를 비롯한 아시아, 폴란드 전역과 독일, 네덜란드, 체코, 오스트리아 등 나치 시절 강제 및 절멸 수용소 등을 15년 넘게 헤매고 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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