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오피니언 칼럼

혼자 사는 노인은 특별해야 수술을 받는다

등록 2021-12-29 17:59수정 2021-12-30 02:32

[숨&결] 양창모 | 강원도의 왕진의사

송 할머니의 안과 수술을 예약하려고 대학병원에 전화를 걸었다. 안내해주는 외래 간호사는 수술 3일 전과 당일에 보호자가 함께 와야 한다고 했다. “보호자라는 건 자제분을 말하는 건가요?” “예. 수술하고 회복실에서 몇시간 지켜봐야 하는데 옆에 누군가가 있어야 해요.” “자제분들이 올 수 있는 상황이 안 되는데. 어쩌죠?” “그러면 수술은 어려워요.” “할머니가 보호자 구할 형편도 못 돼요. 차편도 없어서 안 가시겠다는 걸 겨우 설득해서 병원까지 모시고 가는 건데… 어떻게 안 될까요?” “예. 안 됩니다.” “그러면 자식 없고 보호자 없으면 수술 못 한다는 얘기예요?” 내 질문에 그는 딱 잘라 말했다. “예. 저희 병원에서는 안 돼요.” 그가 말한 ‘저희 병원’은 민간병원이 아니다. 국립대학병원인데도 그랬다.

할머니 집은 안방이 부엌이다. 이부자리 옆에 찬거리들이 널려 있었고 주변엔 걸려 넘어질 것투성이였다. 화장실도 재래식이어서 집 밖에 있다. 밤에는 손전등을 들고 가도 더듬거려야 했다. 두 눈이 멀쩡해도 걸려 넘어질 수 있는데 할머니는 한쪽 눈이 거의 실명 상태다. 아직 걸려 넘어지지 않은 것은 정말 하늘이 도운 일이었다. 그나마 다른 쪽 눈은 수술을 받으면 시력이 회복될 수 있었다. 겨우 설득을 해서 수술받기로 하고 병원에 문의하다 이런 벽에 부딪힌 것이다. 할머니에게 자식이 없는 건 아니다. 아들과 함께 살고 있는데 그도 장애가 있어서 병원에 갈 수가 없다. 타 지역에 사는 자식도 있지만 형편이 어려워지면서 연락이 끊어졌다. 수술 뒤 회복실에서 함께 있어줄 사람이 아무도 없는 것이다.

만약 자식들이 있었더라면, 자식들이 있었더라도 장애가 없었더라면, 장애가 없었더라도 먹고살기 힘들지 않았더라면, 먹고살기 힘들지 않았더라도 연락이 닿았더라면, 연락은 닿았더라도 손 벌리기 미안하지 않았더라면…. 벽이 없으려면 이 모든 ‘만약’ 중 어느 한군데에도 걸려 넘어지지 않아야 한다. 하지만 내가 만나는 시골 어르신 중 다수가 여기에 걸려 넘어진 사람들이다. 병원은 멀지 않은 곳에 있다. 하지만 병원으로 가는 길은 너무나 멀다. 그런데도 제도는, 그리고 그것을 운용하는 사람들은 이 모든 ‘만약’을 당연한 것으로 여긴다. 당연히 보호자가 있고 당연히 차가 있고 당연히 병원에 올 수 있고, 그런 식이다.

2020년 통계청의 자료에 따르면 80살 이상 인구 중에서 혼자 사는 사람은 47만명이 넘는다. 혼자 사는 노인은 특별해야 수술을 받을 수 있다. 내가 오늘 당장 수술을 받아야 한다면 반나절이라도 지켜봐줄 사람이 지금의 나에겐, 다행히 있다. 하지만 내가 팔십이 넘은 나이가 되어서도 그것이 가능할까. 혼자 살고 안방에서 화장실 가는 것도 겨우 하고 외출도 어려워 이웃을 만난 지도 오래된 그때의 나는 그리고 당신은, 정말 그런 특별한 보호자가 있을 것인가. 그런 보호자가 있다면 당신은 정말 복이 많은 것이다. 하지만 병은, 백내장은, 무릎 수술은 복 있는 사람에게만 오는 것이 아니다. 복이 없는 사람에게도 온다. 그런 이들은 어떻게 수술을 받으라는 것인가.

처음 할머니 댁에 왕진 가서 진료할 때였다. 방에 쪼그려 앉아 청진을 하다가 허리를 펴려고 고개를 젖혔는데 천장에 문이 보였다. 깜짝 놀라 자세히 보니 천장 전체가 여러 개의 문짝들로 덮여 있었다. 오래된 가구의 문짝들을 떼어다 붙여서 지붕이랍시고 덮어놓은 거였다. 할머니는 문이 천장에 달린 집에 세 들어 살고 있었다. 그런 문짝들로 하늘을 가린 곳에서 뜨거운 여름과 추운 겨울을 나는 거였다. 그날 밤 자려고 눕는데 내 방 천장에서 그 방의 문짝들이 보였다. 아마도 할머니는 밤마다 그 문을 바라보면서 주무셨을 것이다. 천장에 달린 문은 열 수 없다. 할머니는 평생 자려고 누울 때마다 저 문을 보면서 열고 나가고 싶지 않았을까. 하지만 그날 밤. 나를 짓누른 것은 천장의 열 수 없는 문이 아니었다. 우리가 열 수도 있었던 지상의 문들이었다.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오피니언 많이 보는 기사

물에 빠진 늙은 개를 건져주자 벌어진 일 [아침햇발] 1.

물에 빠진 늙은 개를 건져주자 벌어진 일 [아침햇발]

육사 등 없애고 국방부 산하 사관학교로 단일화해야 [왜냐면] 2.

육사 등 없애고 국방부 산하 사관학교로 단일화해야 [왜냐면]

한덕수가 꿰맞춘 헌법재판관 임명 거부 3가지 논리 [12월27일 뉴스뷰리핑] 3.

한덕수가 꿰맞춘 헌법재판관 임명 거부 3가지 논리 [12월27일 뉴스뷰리핑]

우리가 모르는 한덕수 [12월26일 뉴스뷰리핑] 4.

우리가 모르는 한덕수 [12월26일 뉴스뷰리핑]

계급·젠더·퀴어 ‘사극’…오늘의 민주광장서 튀어나온 듯 5.

계급·젠더·퀴어 ‘사극’…오늘의 민주광장서 튀어나온 듯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