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12월12일 아동 성범죄자 조두순의 거주지 주변에서 일부 유튜버와 시민들이 이날 출소한 조두순을 비난하며 달려들어 이를 막는 경찰과 뒤엉켜 있다. 홍용덕 기자
[세상읽기] 류영재
대구지방법원 판사
2008년 12월 조두순이 행한 아동 성폭행 사건은 대한민국을 경악에 빠뜨렸다. 범행은 잔혹했고 피해는 심각했다. 더하여 성범죄를 당한 피해 아동이 사법적 정의를 구현하기 위해 감당할 것을 요구받은 ‘수사와 재판 과정’이란 매우 가혹했다. 피해 아동은 정신적·신체적 고통 속에서 반복하여 피해 사실을 진술해야 했다. 피해 아동이 이 모든 무참한 순간들을 버텨내고서야 사회는 미성년 대상 성범죄 그 자체뿐만 아니라 미성년 성범죄 피해자가 처하는 수사 및 재판 현실에도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 범행 여부 및 범죄자를 파악하기 위한 증거의 하나로만 취급되던 미성년 성범죄 피해자가 존중받고 보호받아야 할 사람으로 인식된 순간이다.
당시의 화두는 ‘어떻게 하면 미성년 성범죄 피해자가 수사와 재판 과정에서 범죄 피해의 트라우마를 경험하거나 이차 가해로 인한 추가 피해를 입는 것을 막을 것인가’였다. 제시된 대안은 ‘피해 진술 영상녹화 제도’다. 미성년 피해자가 성범죄를 당하면 전문 조사관으로부터 피해 조사를 소상히 받고, 조사기관은 그 조사 과정을 전부 영상녹화한 후 가급적 그것으로 피해자 조사를 종결하며, 법원은 피해자를 법정으로 부르는 대신 영상녹화물을 증거로 채택하여 심리한다는 것이 제도의 골자다. 이에 따르면 미성년 성범죄 피해자는 원칙적으로 범죄 피해를 신고한 후 최초로 받는 1회의 피해 조사를 마침으로써 사법 절차에서 빠져나올 수 있게 된다. 즉, 수사·재판 과정에서 피해 진술을 반복하거나 각종 이차 가해를 마주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미성년 성범죄 피해자에 대한 피해 진술 영상녹화 제도는 2010년 입법되었다.
한편, 국가의 형벌권은 강력한 공권력이다. 주권자인 시민의 합의로 탄생한 국가가 법과 통치체계로부터 부여받은 권한을 사용하여 시민을 처벌하는 것이 정당화되기 위해서는 형사사법절차가 적법절차에 따른 공정하고 공평한 과정이어야 한다. 예컨대, 검찰이 제시한 증거에 대해서 피고인이 그 증거를 충분히 반박할 수 있는 기회를 가져야 법원은 검경의 수사결과에 휩쓸리지 않고 양쪽의 입장을 모두 고려하여 공정하고 공평하게 재판할 수 있게 된다. 적법절차 원칙과 피고인의 공정한 재판을 받을 권리 보장에 따른 국가 형벌권의 제한, 이것이 근대 형법의 핵심 철학 중 하나임은 부정할 수 없다.
피해 진술 영상녹화 제도는 미성년 성범죄 피해자가 반복적으로 피해 진술을 하거나 피고인의 추궁을 맞닥뜨리는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트라우마 재발과 이차 가해로 인한 피해를 차단하는 데 효과적이었지만, 그만큼 피고인이 공정한 재판을 받을 권리를 침해한다는 문제 제기를 촉발했다. 피해자가 원칙적으로 1회의 피해 조사만으로 수사·재판 과정에서 이탈할 수 있게 됨으로써 피고인은 수사 및 재판의 그 어떤 과정에서도 피해자의 피해 진술을 직접 반박하거나 추궁하지 못하게 되어 피고인의 반대신문권이 사실상 형해화된다는 문제제기였다. 물론 법원이 필요하다고 판단할 때에는 여전히 피해자를 증인으로 소환할 수 있었지만 그 판단이 법원의 재량이란 점에서 논란의 여지가 남아 있었다.
헌법재판소는 이 제도에 대해 2013년 합헌 결정을 내렸다. 성범죄 피해 경험에 대한 반복적 회상과 이차 가해의 위험으로부터 피해아동을 보호해야 한다는 공익의 중요성에 비춰 보았을 때 영상녹화 제도로 인한 피고인의 반대신문권 제한이 부당하지 않고, 필요에 따라서는 피해자 소환이 가능한 만큼 피고인의 공정한 재판을 받을 권리가 형해화되었다고 볼 수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그에 반해 반대의견은 피해자 소환이 재판부의 재량 판단에 따르는 것인 만큼 피고인의 반대신문권이 보장되었다고 볼 수 없고, 증거보전제도나 비디오 중계장치에 의한 피해자 증인신문을 통해 피해자를 보호할 방법이 마련되어 있으므로 피고인의 권리를 형해화하는 영상녹화 제도는 위헌이라는 취지다. 그로부터 8년 후, 헌법재판소는 미성년 성범죄 피해 진술 영상녹화 제도에 대하여 위헌 결정을 내렸다. 위헌의 다수 의견과 그에 대한 반대 의견의 논거는 2013년의 결정의 그것과 사실상 동일하다.
문제는 이제부터다. 미성년 성범죄 피해 진술 영상녹화 제도의 도입 이전에는 피해자 보호와 피고인의 방어권 보장 사이에서 절충점을 찾기 위한 입법보완 논의가 있었으나 영상녹화 제도가 전격적으로 도입되고 헌법재판소가 합헌 결정을 내린 이래 우리 사회는 제도의 보완을 사실상 중단했다. 특히 피해자의 법정 진술이 영상녹화로 원칙적 대체됨으로써 아동 대상 성범죄 및 아동 진술의 특수성을 충분히 고려한 재판 형태(전문가에 의한 증인신문, 아동의 비언어적 의사소통에 관한 판사 교육, 부적절한 신문사항 제한에 관한 구체적 법규 및 지침 마련, 아동과 피고인의 완전 분리를 위한 물적 설비 마련 등)에 관한 입법적·재판 실무적 보완이 진행되지 않은 상태다.
이런 상황에서 새해부터는 미성년 성범죄 피해자가 피해 진술을 영상녹화 했더라도 피고인의 반대신문에는 직접 응해야만 하는 방식으로 재판이 진행된다. 영상녹화로 피해자의 법정진술을 대체하는 제도가 위헌이 되었다고 하여 갑자기 미성년 성범죄 피해자의 피해경험 재생으로 인한 고통과 이차 가해로 인한 피해가 발생하지 않을 리 없다. 헌법재판소의 위헌 결정으로 피고인의 방어권이 보장되는 길이 열렸다면, 위헌 결정만으로 결코 해결되지 않은 피해자 보호의 책무는 법원이 담당하여야 한다. 입법적 보완만 기다려선 안 된다. 시계를 2010년 이전으로 되돌릴 수는 없다. 무거운 마음으로 새해를 맞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