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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숨&결] 안 함의 함

등록 2022-01-03 18:22수정 2022-01-04 02:31

이안 | 시인·<동시마중> 편집위원

2021년 1월1일에 넘겨받은 숫자는 88+74=162였다. 이 숫자는 하루에 둘씩 늘어서 1월26일에 113+99=212로 최대가 되었다가 27일에는 114+0=114로 반 토막 나더니 급기야 28일엔 앞 숫자마저 0이 되어 허망하게 사라지고 말았다. 그 뒤로도 자질구레한 시도와 실패가 이어졌는데 3월16일부터 6월3일까지 모은 75+75=150이 가장 큰 성과였다. 그리고 또 실패, 시도, 실패, 시도, 실패의 반복 끝에 8월9일부터 다시 숫자가 모아지기 시작해서 새해 첫날 넘겨받은 숫자는 146+146=292다. 1월4일 오늘은 149+149=298, 내일이면 300에 도착한다.

앞은 금주, 뒤는 금연 날짜다. 둘을 더하면 날마다 숫자가 둘씩 늘어나서 실제보다 두배 더 많은 날을 실천한 것 같은 착시 효과를 낸다. 이 방법은 금주와 금연을 함께 시작할 때 도움이 된다. 하루가 이틀이 되고, 이틀은 나흘이 되는 셈이니 하지 않아서 얻게 되는 뿌듯함이나 자존감이 두배의 속도로 두터워진다. 음주와 흡연 신호가 닿자마자 금이 가버리는 유리 멘탈, 과도한 알코올-니코틴 의존증 환자는 이런 것이라도 만들어 기대고 있어야 한다.

성년이 되고부터 나를 둘러싼 기억의 사방과 사시사철이 음주와 흡연에 깊이 연루되었다. 눈이 오면 눈이 온다고, 비가 오면 비가 온다고, 풍경이 좋으면 풍경이 좋다고, 기분이 별로면 기분이 별로라고, 안 올 것만 같았던 새해가 왔다고, 오늘이 바로 그 첫날이라고. 어떤 조건이든 척척 술이랑 담배랑 짝을 맞추었다. 또 하나의 손가락 같거나 또 하나의 입김 같은, 그걸 손가락 새에 끼고 있지 않으면 한 글자도 쓸 수 없을 것 같은 잘못된 암시. 들숨에도 붙고 날숨에도 붙어버린 나쁜 습관. 어떻게 하면 벗어날 수 있을까. 중독된 자아의 유혹과 명령은 언제 어디서나 참된 자아보다 유능하게 깨어 있다.

보름 전인 12월 중순 어느 날, 이런 말을 에스엔에스 상태 메시지로 올렸다. ‘안 함의 함’. 술 담배와 1년의 고투 끝에 내게 온 말이었다. 한자로 적으면 무위지위쯤 될까. 적극적 수동성이라고 불러도 괜찮을 듯싶다. 내가 좋아하는 무용지용이란 말과 같은 짜임새라서 더 쏙 맘에 들었다. ‘안 함의 함’이라고 적어놓으니 ‘하지 않음의 함’에 가속 페달을 슬쩍 얹은 말 같아서 더 잘 안 함을 실천할 것 같은 믿음마저 생긴다.

그러니까 2022년 새해 첫날 내가 받은 것은 146+146=292란 숫자와 함께 ‘안 함의 함’이란 ‘올해의 말’이다. 새해에는 날마다 둘씩 늘어나며 높아지는 숫자의 산을 은은한 기쁨으로 우러르련다. 나서고 달려드는 함으로써의 태도가 아니라 물러서고 놓아두는 안 함으로써의 태도. 안 하는 것만큼 적극적인 함도 드물다. ‘안 함의 함’은 그것이 무엇이든 중독된 자아에 대한 불복종 운동의 슬로건이다. 중독된 자아가 원하는 걸 의지적으로 안 함으로써 언젠가부터 그것에 빼앗겨 잃어버린 참된 자아를 기어코 되찾고 말겠다는 불퇴전의 각오다.

이렇게 하루하루 늘어나는 숫자는 쓰지 않고 쌓이는 돈, 바로 그것이기도 하다. 하루에 술값으로 1만원, 담뱃값으로 4500원을 쓴다고 하면, 1만4500원. 올해 최저 시급 9160원의 1.58배에 달한다. 여기에 음주와 흡연에 들이는 시간까지 계산하면 입이 떡 벌어질 정도의 자원이 단지 그 일을 안 하는 것만으로 보존되는 셈이다. 무언가를 하는 데 드는 시간적 경제적 비용, 육체적 정신적 에너지의 손실을 감안하면 ‘안 함의 함’이야말로 나 자신과 이 세상의 무질서도를 높이지 않는 친지구적 방법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아낀 시간, 아낀 돈으로 딱히 무얼 하려는 게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나 사용하지 않기, 나 묵혀두기다. 이렇게 모은 쉼의 에너지를 어떤 희망이나 열망으로도 전환하지 않기. 바쁘게 돌아가느라 거죽이 다 벗겨진 지구(인)의 시간 어디쯤에는 푸른 이끼가 끼는 시간도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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