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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김봉규의 사람아 사람아] 안네는 수많은 주검과 한데 엉켜 잠들었다

등록 2022-01-11 18:09수정 2022-01-12 02:01

제노사이드의 기억_독일
지금도 내 머릿속에 남아 있는 장면은 수용소에 끌려온 이들이 가슴 앞에 분필로 쓴 수감자 번호를 들고 있는 모습이다. 나이 든 사람들은 곧 닥칠 죽음을 예감한 듯 한결같이 표정이 어두웠던 반면, 젊은 여성들은 밝은 미소를 띠고 있었다. 대부분 사진에서 그랬다. 젊은 사람들은 죽음보다는 희망을 보았겠지 싶었다.

2019년 이른 봄, 한 독일 소녀가 베르겐벨젠 수용소 터에 남아 있는 안네 프랑크의 표석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 검은색 표석에는 언니 마르고트의 이름도 함께 새겨져 있었다. 하노버/김봉규 선임기자
2019년 이른 봄, 한 독일 소녀가 베르겐벨젠 수용소 터에 남아 있는 안네 프랑크의 표석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 검은색 표석에는 언니 마르고트의 이름도 함께 새겨져 있었다. 하노버/김봉규 선임기자

안네 프랑크는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의 은신처에서 가족과 함께 761일을 숨어 지내다 주변의 신고로 발각되었다. 몇곳의 수용소를 거쳐서 150만여명이 가스실에서 죽어간 폴란드의 오시비엥침(아우슈비츠)으로 끌려갔다. 엄마 에디트는 아우슈비츠에서 숨졌다. 안네와 언니 마르고트는 독일 하노버 첼레의 북서쪽 약 16㎞ 외곽에 있는 베르겐벨젠 수용소로 다시 보내졌다.

나는 암스테르담에서 안네의 은신처와 주변을 살펴본 뒤 2019년 3월10일 기차로 독일 첼레에 도착했다. 늦은 밤, 예약된 숙소의 우편함에 있어야 할 방 열쇠가 없었다. 날씨는 쌀쌀해졌고, 자정을 넘긴 시골 마을에선 인기척조차 찾을 수 없었다. 길거리에서 노숙해야 할 상황에 부닥쳐 한참을 어찌할 줄 모르고 서성거렸는데, 아프리카계 독일인 두명을 우연히 만났다. 그들은 늦은 밤에도 문을 연 다른 호텔로 나를 데려다주었다. 호텔의 중년 여성 직원은 방값에 조식 비용이 포함돼 있지 않다고 해서 나는 먹지 않겠다고 했다. 그가 이곳엔 왜 왔냐고 물어 ‘안네 프랑크의 흔적들을 찾아다닌다’고 했더니 방 열쇠를 받고 돌아서는 나를 불러 세웠다. 그녀는 “이른 아침 수용소 터로 가려면, 빈속으로는 힘들 수 있으니 아침을 먹고 가라”고 했다. 그가 나에게 왜 그런 호의를 베푼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아무튼, 다음날 아침 호텔 조식으로 배를 채웠다.

수용소 터에는 새로 지은 기념관 건물 외 당시 건축물이 하나도 없었다. 그냥 공터였다. 수용소 해방 직후 장티푸스 등 전염병 확산을 막기 위해 모든 시설물을 불태워버렸기 때문이다. 강제수용소 당시의 모습을 재현해놓은 기념관 내 조감도를 통해 그 규모를 상상할 수 있을 뿐이었다. 항공사진을 들여다보니 당시 수용소는 아무도 살지 않는 널따란 들녘에 철책을 둘러서 만든 것이었다.

1945년 4월15일 수용소를 처음 접수한 한 영국 군인은 “죽은 시신과 죽어가는 자가 수용소에 나란히 누워 있었다. 그곳에서 산 자들을 분리하는 과정이 고통스러웠다”는 증언 기록을 남겼다. 홀로코스트로 가족 50명을 잃고 이곳 수용소에서 살아난 수전 폴럭은 “시체들이 옆에서 썩어갔고, 내 마음은 공허해져서 죽어가고 있다는 것을 확신했다”는 말도 남겼다. 수용소 마당에 수북이 쌓인 주검들을 불도저로 밀어 쓸어 담는 기록 사진의 장면은 아직도 잊을 수 없다. 더 충격적인 장면도 있었다. 어떤 활동사진에는 잔뜩 쌓인 시체 더미에서 팔다리가 꿈틀거리는 살아 있는 사람이 보였다. 지금도 내 머릿속에 남아 있는 장면은 수용소에 끌려온 이들이 가슴 앞에 분필로 쓴 수감자 번호를 들고 있는 모습이다. 나이 든 사람들은 곧 닥칠 죽음을 예감한 듯 한결같이 표정이 어두웠던 반면, 젊은 여성들은 밝은 미소를 띠고 있었다. 몇몇 여성의 머리는 풍성하고 윤기로 반질거렸다. 대부분 사진에서 그랬다. 젊은 사람들은 죽음보다는 희망을 보았겠지 싶었다.

전시실을 나와 수용소 터를 둘러보았는데 텅 빈 들판처럼 황량했다. 내 눈에는 사진에 담을 만한 사물뿐만 아니라 어떠한 빛도 읽히지 않았다. 비는 내리고 먹구름이 수용소 터를 뒤덮고 있었지만, 사진에는 담아내지 못하고 서성거리기만 했다. 야트막한 야산처럼 보이는 흙더미 몇개가 보여 살펴보니 무덤이었다. 적게는 800명에서 1000명, 많게는 2500명이 함께 묻혀 있다고 쓰여 있었다. 수용소 해방과 함께 영국군이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는 시신들을 한데 모아서 거대한 무덤을 만든 것이었다.

수용소 터를 이리저리 헤매고 있었는데 안네 프랑크의 시신 없는 표석이 눈에 들어왔다. 표석에는 언니 마르고트의 이름도 같이 새겨져 있었다. 언니가 먼저 죽었고, 안네는 수용소 해방을 앞둔 1945년 2~3월께 장티푸스로 사망했다. 표석 주변에는 꽃, 손편지, 사탕을 담은 유리병과 촛불이 놓여 있었다. 독일 스카우트 학생들이 표석 위에 하얀 조약돌을 올려놓고 비를 맞으며 서 있었다. 조약돌 가운데에 ‘평화’라는 글씨가 보였다. 기념관을 나서면서 박물관 직원에게 “안네 프랑크는 어디에 묻혀 있나요”라고 물었다. “이곳에서 언니와 함께 숨진 것은 확실하다. 어디에 묻혀 있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1000여명 단위의 큰 무덤 속에 여러 희생자와 함께 묻혀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렇게 안네는 수많은 주검과 한데 엉켜서 잠들어 있었다.

김봉규 | 사진부 선임기자.
다큐멘터리 사진집 <분단 한국>(2011), <팽목항에서>(2017)를 출간했다. 제주 4·3 학살 터와 대전 골령골을 비롯해 전국에 흩어진 민간인 학살 현장을 서성거렸다. 안식월 등 휴가가 발생하면 작업 지역을 넓혀 캄보디아 ‘킬링필드’를 비롯한 아시아, 폴란드 전역과 독일, 네덜란드, 체코, 오스트리아 등 나치 시절 강제 및 절멸 수용소 등을 15년 넘게 헤매고 다녔다. bong9@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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