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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전선을 축소해야 한다

등록 2022-01-26 18:34수정 2022-01-27 11:26

우크라이나에 인접한 크림반도에서 지난 18일 러시아군 장갑차 행렬이 도로를 달리고 있다. 러시아는 2014년 우크라이나의 크림반도를 무력으로 합병했다. AP 연합뉴스
우크라이나에 인접한 크림반도에서 지난 18일 러시아군 장갑차 행렬이 도로를 달리고 있다. 러시아는 2014년 우크라이나의 크림반도를 무력으로 합병했다. AP 연합뉴스

[편집국에서] 길윤형 | 국제부장

지난 주말 울적한 마음에 도고 시게노리(1882~1950)의 회고록을 꺼내 읽었다. 임진왜란 때 일본으로 끌려간 조선 도공의 후예인 도고(조선식 이름은 박무덕)는 1941년 12월 미국에 개전을 선언한 도조 히데키 내각의 외무대신으로 역사에 이름을 남겼다. 끔찍한 파국으로 다가가는 우크라이나 주변 정세를 보며, 80년 전 비슷한 상황에서 전쟁을 막지 못한 도고의 내면이 궁금해졌던 것 같다.

도고는 자신이 충성을 바쳤던 ‘대일본제국’처럼 모순으로 점철된 삶을 살았다. 그의 삶을 꿰뚫는 가장 큰 모순은 태평양전쟁의 개전과 패전이라는 정반대의 국면에서 외무대신으로 일했다는 사실일 것이다. 1937년 7월 중-일 전쟁으로 일본의 대륙 침략이 본격화된 뒤 미-일 관계는 급속히 악화되기 시작했다. 4년이 흘러 갈등이 ‘원유 금수’ 등 험악한 제재 국면으로 돌입한 뒤인 1941년 10월17일 밤 11시 반께 도조가 도고에게 전화를 걸어왔다. 외무대신을 맡아달라고 요청하는 연락이었다. 그는 “상당한 양보를 각오하고 합리적인 기초 위에서 (미국과의) 교섭이 성립하도록 진실로 협력하겠다는 뜻이 없다면 입각을 승낙할 의사가 없다”고 답했다.

도조는 협력하겠다고 했지만, 협상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코델 헐 미 국무장관은 11월26일 일본에 훗날 ‘헐 노트’란 이름이 붙게 되는 최후통첩장을 제시했다. 문서엔 △무조건 중국에서 철수할 것 △장제스의 국민당 정권 외의 중국 정부를 인정하지 말 것 △독-이-일 3국 동맹을 폐기할 것 등의 요구가 담겨 있었다. 도고는 미국의 요구를 “긴 세월에 걸친 일본의 희생을 완전히 무시하고, 극동의 대국으로서 지위를 버리라는 뜻”이라 받아들이고 교섭을 포기하게 된다. ‘최후의 온건파’가 낙담한 직후인 12월8일 새벽 진주만 공습이 이뤄졌다. 그 결과 일본은 자국민 310만명과 그보다 더 많은 주변국 시민들을 죽음에 이르게 한 무모한 전쟁에 휩쓸리게 된다.

복잡다단한 세계사를 공부할 때마다 지구상의 모든 나라엔 저마다 독특한 사정이 있고, 그래서 결코 양보할 수 없는 ‘선'을 마음에 품게 된다는 사실을 절감한다. 80년 전 일본에겐 그것이 ‘극동의 대국으로서 지위’였고, 현대 중국에겐 대만은 중국의 일부라는 ‘하나의 중국’ 원칙이며, 러시아에겐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가 옛 소련의 일부였던 우크라이나까지 확장되는 것을 허용할 수 없다는 마지막 자존심이다.

그에 비해 미국은 어떤가. 조 바이든 대통령은 여러 전선에서 힘겨운 대결을 이어가고 있다. 처음엔 우크라이나와 대만해협이라는 ‘두 개의 전선’이 있을 뿐이라 생각했지만, 큰 착각이었다. 2015년 7월 핵협정(JCPOA)을 되살려 국가의 존엄을 지키려는 이란은 중국·러시아에 필사적으로 접근 중이고, 북한은 ‘적대시 정책 철회’를 주장하며 괴상한 미사일을 연일 쏘아대고 있다. 내우외환의 위기에 허약해진 미국이 이 모든 전선에서 승리를 얻기란 아마도 불가능할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미국 내에서도 이제 그만 합리적으로 사고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들려오고 있다. 윌리엄 페리 전 국방장관 등은 13일치 <엘에이 타임스> 기고에서 “2021년의 이란은 20년 전 북한과 비슷하다”며 이 문제를 지금처럼 방치하면 이란 역시 20년 뒤 핵무장을 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들은 “완벽을 추구하는 것은 좋은 일을 하는 데 때로 적이 된다”고 덧붙였는데 곰곰이 되씹어야 할 명언이 아닐 수 없다. 마이클 키미지 미국 가톨릭대 교수의 주장은 한층 더 과감하다. 그는 17일 ‘나토의 문호를 닫아야 할 때’란 제목의 <포린 어페어스> 기고에서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나라(러시아)가 옆에 있는데, 이미 지나치게 확장된 동맹에 우크라이나까지 끌어들이는 것은 ‘전략적 광기’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모두가 절박한 상대들 앞에서 미국이 반드시 지켜야 할 ‘선'은 무엇일까. 향후 인류의 운명을 결정하게 될 중국과의 전략경쟁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하는 일일 것이다. 이를 위해선 과감한 전선의 축소가 필요하다. 러시아, 이란, 무엇보다 북한과의 갈등을 수습하기 위해 “상당한 양보를 각오하고, 합리적 기초 위에서 교섭이 성립하도록 진실로 협력”해야 한다.

charism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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