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2월12일 오전 여성 유권자 단체인 샤우트아웃 회원들이 서울 여의도 국민의힘과 더불어민주당 당사 앞에서 여성 혐오를 방관한 채 대선을 치르려는 두 당 후보를 비판하는 릴레이 시위를 벌였다. 윤운식 선임기자 yws@hani.co.kr
장석준 | 출판&연구집단 산현재 기획위원
참으로 당혹스러운 대선이다. 양대 정당과 그 열혈 지지자들의 주장에 따르면, 상대편 후보가 당선될 경우에 대한민국의 멸망은 시간문제다. 한쪽은 반대편이 집권하면 비선 실세들이 판치다 결국 내치든 외교든 다 망치고 제2의 촛불항쟁이 일어날 것이라 한다. 다른 쪽은 반대편이 집권하면 포퓰리스트 독재를 일삼다 나라 살림을 거덜 내고 중국·북한에 끌려다니는 신세가 될 것이라 한다.
두 이야기 다 허위나 과장이 아니라면, 대한민국의 운명은 이미 결정된 셈이다. 현 제도 아래에서야 두 후보 중 한 명이 당선될 게 기정사실이니 3월10일 아침에 결과가 어떻게 나오든 우리는 그날부터 위기의 시대를 살 운명이다.
아니, 진실을 말하면, 위기는 이미 오래전에 시작되었다. 지금 우리는 위기 일보직전이 아니라 그 한가운데에 있다. 그러니 양대 정당 중 한쪽이 승리하면 위기가 온다고 호들갑을 떨 필요도 없을뿐더러 투표 다음날부터 어떤 시대가 열릴지 조마조마해할 이유도 없다. 그런 초조함은 벼랑에서 벌써 떨어지고도 자기가 공중에 있는 줄 모르는 만화영화 주인공과 같은 때늦은 반응이다.
실은 이번 대선이 6공화국 역사상 가장 어처구니없어 보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양대 정당이 내세운 후보는 둘 다 위기 은폐용 후보다. 각 진영이 빠져든 심각한 위기의 실체를 가리고 파국을 지연하기 위한 후보다. 다들 이를 어느 정도는 알아채고 있지만, 모르는 척한다. 대선이라는 의례를 앞두고 대한민국 시민들은 참으로 이상한 게임을 벌이는 중이다.
우선 더불어민주당과 이재명 후보 쪽을 보자. 현재 한국 정치의 시간대는 어느 세력의 경우든 예외 없이 2016~17년 촛불항쟁에서 시작된다. 민주당의 위기란 다름 아니라 촛불로 집권하고도 촛불을 배반한 데서 비롯되었다. 전임 박근혜 정권과 똑같이, 이들은 사회개혁 약속을 잔뜩 늘어놓고는 하나도 제대로 추진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대선에서 재집권하자면, 다시금 자신들을 개혁세력으로 보이게 할 카드가 필요했다. 민주당에 남은 자원은 중앙정부가 손 놓고 있는 동안 뭐라도 하는 모습을 보인 몇몇 광역자치단체장이었는데, 그중에 끝까지 피선거권을 유지한 이는 경기도지사뿐이었다. 민주당 주류는 이 이유로 그를 후보로 선택했다. 뒤늦게라도 사회개혁에 나서려고 진지하게 결의해서가 아니라 단지 다시 개혁적으로 보이고 싶어 현재의 후보를 택한 것이다. 대선만 어떻게든 넘기고 보자는 이 속셈을 유권자들도 다 안다.
국민의힘과 윤석열 후보 쪽은 어떤가. 촛불 이후 이 진영은 정체성 위기에서 한번도 빠져나와본 적이 없다. 현 정부와 여당에 대한 염증 덕택에 반사이익으로 몇몇 선거에서 이겼고 지금도 그런 요행수를 바라고 있지만, 도대체 이 당이 한국 사회를 어디로 이끌려 하는지는 그들 스스로도 잘 모르는 것 같다. 달리 보면, 현재 젊은 당대표를 중심으로 반페미니즘 선동에 저토록 매달리는 이유도 그만큼 그간 새로운 정체성 정립에 계속 실패했기 때문이다. 국민의힘 역시 이런 상황에서 이번 대선을 어떻게든 넘겨보려고 당원이 된 지 1년도 안 된 인물을 대선 후보로 내세우고 있다.
양대 정당이 모두 이런 형편이니, 결국 두 당이 독점해온 6공화국 정치 전체가 위기가 아닐 수 없다. 한국 사회에서 더는 정치의 기능을 수행할 수 없는 상태에 이르렀는데도 다들 이를 못 본 척하며 대선을 치르는 중이다. 이 진실을 똑바로 가리키지 않는 한, 이제 어떤 대안도 솔직하거나 힘 있게 들릴 수 없다. 어쩌면 진보정당을 비롯한 제3세력이 좀처럼 부각되지 못하는 것도 이를 직설적으로 이야기하지 않기 때문은 아닐까.
그러나 더는 머뭇거릴 때가 아니다. 빤한 대선 결과에 넋을 뺏길 게 아니라 그 뒤에도 계속돼야 할 정치혁명을 위해 시민들의 지혜와 열정을 다시 모으자는 세력이 있어야 한다. 나는 이 미래의 야당에 희망을 걸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