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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장석준의 그래도 진보정치] 비극 속에서도 움트는 평화의 싹

등록 2023-11-22 18:45수정 2023-11-23 02:39

팔레스타인 무장정파 하마스와 이스라엘이 4일간의 임시휴전에 합의한 22일(현지시간) 이스라엘군의 공격을 받은 가자지구 북부에서 시커먼 연기가 뿜어져 나오고 있다.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여성과 아동 수감자 150명을 풀어주고 하마스에 붙잡힌 인질 50명을 돌려받는 조건으로 하마스와 4일간의 휴전에 합의한 것으로 전해졌다. AFP 연합뉴스
팔레스타인 무장정파 하마스와 이스라엘이 4일간의 임시휴전에 합의한 22일(현지시간) 이스라엘군의 공격을 받은 가자지구 북부에서 시커먼 연기가 뿜어져 나오고 있다.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여성과 아동 수감자 150명을 풀어주고 하마스에 붙잡힌 인질 50명을 돌려받는 조건으로 하마스와 4일간의 휴전에 합의한 것으로 전해졌다. AFP 연합뉴스

장석준 | 출판&연구집단 산현재 기획위원

이스라엘군이 가자지구 침공을 막 시작하던 11월 초, 미국의 좌파저널 ‘자코뱅’ 인터넷판은 이스라엘의 한 젊은 사회과학도가 정리한 평화해법을 소개했다. 글쓴이는 1991년생인 하임 카츠만으로, 미국에서 태어나 부모를 따라 이스라엘로 이주하고 그곳에서 평화운동에 뛰어든 인물이다. 그가 제안한 내용은 과감하게도 유대인과 팔레스타인인이 한 국가 안에서 동등한 시민으로 살아가는 ‘일국해법’이었다.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두 국가의 분립과 평화 공존을 추구하는 ‘이국해법’을 이스라엘 극우파가 무참히 짓밟은 현 상황에서는 일국해법이 오히려 더 현실적인 대안이라는 것이다.

카츠만이 ‘자코뱅’을 통해 내놓은 이 제안은 결코 외로운 몽상이 아니다. 이미 여러 구체적 대안도 제출되어 있다.

그중 하나는, 이스라엘인과 팔레스타인인이 함께 참여하는 단체 ‘만인을 위한 하나의 땅’이 내놓은 국가연합 안이다. 이 구상은 이국해법을 계승하면서도 사실상 일국해법으로 나아간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이 각각 독자정부를 갖되 유럽연합처럼 국경을 개방하자는 것이다. 또한 소국이 감당하기 힘든 사회간접자본(SOC)을 공유하고 치안과 국방도 공동으로 운영하자고 한다.

또 다른 방안은 ‘단일민주국가운동’이 주창하는 더 완전한 일국해법이다. 지중해에서 요단강에 이르는 지역에 유대인과 팔레스타인인을 아우르는 하나의 헌정체제를 수립하자는 것이다. 이 단일국가에서 유대인과 팔레스타인인은 일정한 민족자치권을 누리면서도 동등한 시민으로 함께 살아간다. 여기에서 중요한 과제 중 하나는 유대인 이주민에 한해 시민권을 부여하는 이스라엘의 귀환법을 폐지하는 것이다. 이를 폐지해야만 이스라엘은 비로소 세속적 민주정체로 거듭날 수 있고, 종족과 종교가 다른 이들을 시민으로 품어 안을 수 있게 된다.

한데 이런 대안들을 실현하기에 지금 이스라엘 사회는 너무 극우화돼 있다. 카츠만은 이 상황이 1960년대 말부터 시작된 끈질긴 서안지구 유대인 정착촌 건설운동에 바탕을 둔다는 점에 주목한다. 사실 극우파의 거점이 된 유대인 정착촌을 세운 이들 중 다수는 이스라엘의 빈곤층이었다. 극우파가 이렇게 가난한 유대인의 대중운동에 뿌리내리고 성장했다면, 진보와 평화를 추구하는 이들 역시 그에 상응하는 대중운동을 통해 역사를 뒤집어야 한다는 것이 카츠만의 결론이다. 그리고 그는 이 결론을 몸소 실천했다. 쇠퇴하는 키부츠들을 평화 거점으로 만들기 위해 그는 가자지구에 인접한 홀릿 키부츠로 향했다.

하마스가 이스라엘을 급습한 10월7일, 홀릿 키부츠도 무자비한 공격 대상이 되었다. 그날 카츠만도 살해당했다. 생존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그는 마지막 순간에 다른 이들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자기 몸을 던졌다고 한다. 이 죽음은 하마스가 얼마나 무도한지 증명하는 사례로 전 세계에 타전됐지만, 카츠만의 부모는 평화를 위해 싸워온 그의 삶이 평화를 거스르는 선전에 이용돼선 안 된다는 뜻을 단호히 밝혔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가 처한 비극적 현실이다. 낡은 구조가 낳은 죄악은 그 구조를 넘어서려고 분투하는 이들까지 무참히 쓰러뜨린다. 그러나 희망은 여전히 그곳에서, 그리고 이곳에서 계속 부활하는 ‘카츠만’들에게 있다. 오직 이런 화답을 통해서만, 2천년 전에 그랬듯이, 비극에만 머물지 않는 놀라운 집단적인 이야기가 다시 시작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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