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0월1일 <엠비엔>(MBN) 토론회에 출연한 윤석열 후보의 손바닥에 한자로 ‘왕’자가 선명하게 보인다. <엠비엔> 유튜브 채널 갈무리
[세상읽기] 한승훈 | 종교학자·원광대 동북아시아인문사회연구소
여러모로 안 좋은 의미에서 대선 정치판을 떠들썩하게 했던 대통령 후보의 종교성에 대한 논란도 이슈의 파도에 밀려 꽤 잠잠해졌다. 종교학자로서는 이제 진영논리를 떠나 이 소동이 드러낸 한국 종교 문화의 일면에 대해 고찰해보고픈 지적 유혹과 책임을 느낀다. 무속, 미신, 기복, 주술, 점복 등의 개념들이 공적 담론의 영역에서 전에 없이 화제가 되었지만 논의의 수준은 비참할 정도로 저열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한국인들의 삶 속에 엄연히 존재하는 현상임에도 불구하고 공적 영역에서 언급되기는 꺼려지는 어휘들이다.
그렇다면 당사자인 무속인들은 이번 논란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 무속에 대한 비난과 혐오의 언어가 공론장을 뒤덮고 있음에도 정작 무속인의 입장을 대표하는 메시지는 찾아보기 힘들다. 제도종교들이 전국적, 국제적인 조직을 가진 대기업 프랜차이즈 집단들이라면, 골목상권의 자영업자에 해당하는 무속인들의 조직화는 비교적 미약하기 때문이다. 다만 경천신명회와 대한경신연합회가 작년 10월에 발표한 입장문이 있다. 경천신명회는 무교(무속)를 경전, 교리, 성직자 등을 갖춘 명실상부한 ‘민족종교’로 재편하려 하는 교단이다. 그 기반이 된 조직이 1970년대 이후 존속해온 대한경신연합회다. 입장문은 자신들의 신앙이 미신이 아닌 고대로부터 전해 내려온 전통종교이자 호국종교라고 주장하는 한편, “우리의 신교를 지켜주실 그분, 하늘에 천부인을 받으시고, 천명을 받으신 그분, 영성이 바르신 그분”이 대통령이 되어야 한다고 마무리된다.
“그분”은 누구인가? 일부 보도에서는 이 글이 반대자들에 의해 무속 친화적이라고 공격받고 있는 윤석열 후보에 대한 지지 선언이라고 해석한 바 있으나, 당사자들에 의해 즉각 반박되었다. 무속의 제도종교화를 지향하는 이들 단체의 입장에서는 특정 정치세력을 공개적으로 지지하는 것보다는 ‘정교분리’의 원칙을 지키고 있음을 표명하는 편이 이익이다. 따라서 “그분”이란 특정 후보라기보다는 막연하게 제시된 메시아적 인물로 보아야 할 것이다. 필자가 주목하는 것은 그 인물이 “영성이 바르신” 분이라고 표현되고 있다는 점이다. 영성은 제도종교의 범주에 구애되지 않는 종교성을 가리키기 위해 널리 사용되고 있는 현대종교의 용어다. 최근의 종교인구 조사에서는 ‘영적이지만 종교 소속이 없음’(SBNR, Spiritual But Not Religious) 정체성을 조사항목에 포함시키는 경우도 늘고 있다.
논란의 녹취록에서 김건희씨는 자신이 “영적인 사람”이라 “도사”들과 삶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를 얘기하는 것을 좋아한다고 말했다. 이 “도사” 발언은 그동안 윤석열 후보 주변에 있는 것으로 알려진 천공스승, 무정스님, 건진법사 등과 관련하여 주목되어 왔다. 비판자들은 이런 인물들을 ‘미신’, ‘무속’ 범주로 다루며 공격해왔지만, 당사자는 이들을 영성 범주에 포함되는 인물로 보고 있다는 증거다. 이것은 규범적인 제도 밖에 있는 종교현상들을 옹호하는 내부의 언어다. 비슷한 레토릭은 정치적으로는 반대 진영에 있는 조응천 의원의 발언에서도 보인다. 조 의원은 더불어민주당 선대위에 한국역술인협회장이 참여한 일이 문제가 되자, 역술이나 관상은 주역 등을 공부해서 하는 “확률 게임”으로 “일종의 과학”이라고 말했다. 그러니 역술인은 접신을 통해 신점을 치는 무속인과는 다르다는 주장이다. 사주명리학이나 관상 등이 일종의 통계학이라는 것은 점복의 현대적 의의를 인정하는 이들이 내세워온 논리다. 그러나 사주팔자나 외모가 운명에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이 확률이나 통계를 통해 입증된 사례는 없다. “주변에 정말로 점이 잘 맞는 경우가 많더라”라는 정도의 이야기를 우리는 ‘경험과학’이 아니라 ‘확증편향’이라 부른다.
어느 시대에나 정치권력을 획득하려 하는 이들은 불확실한 미래를 내다볼 수 있는 수단에 목말라 있었다. 오늘날 이 수요는 영성이나 과학이라는 좀 더 권위 있어 보이는 언어로 정당화되고 있다. 이는 어떤 의미에서도 바람직하다고 할 수 없는 현상이지만, 무속이나 역술에 대한 혐오로만 접근하는 것은 소모적이다. 우리는 헌법이 규정한 종교의 자유가 어떤 믿음과 실천까지를 포괄하는 것인지, 그리고 그것이 공적 영역과 어떤 관계를 맺을 수 있는지를 진지하게 논의할 필요가 있다. 이를테면 이런 질문이다. 무당들은 노골적인 정치 개입을 시도하는 종교지도자들보다 정말로 더 해로운 이들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