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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봄의 정치를 위하여

등록 2022-02-14 18:11수정 2022-02-15 02:32

봄의 시작을 알리는 입춘을 하루 앞둔 3일 부산 동래구 한 주택가에 매화가 꽃망울을 터트려 봄소식을 전하고 있다. 연합뉴스
봄의 시작을 알리는 입춘을 하루 앞둔 3일 부산 동래구 한 주택가에 매화가 꽃망울을 터트려 봄소식을 전하고 있다. 연합뉴스

[숨&결] 이안 | 시인·<동시마중> 편집위원

오늘이 정월대보름이고 나흘 뒤가 우수다. 입춘 무렵부터 까치는 나뭇가지를 물어 나르며 집수리하느라 바쁘고 호숫가 빨간 오리발은 점차 분홍빛으로 바뀌기 시작한다. 볕바르고 물기 어린 흙에 앉아 겨울을 난 돌멩이에선 아차차, 실뿌리가 내리기도 할 것이다. 지난겨울은 되우 춥고 눈이 적었다. 우수도 가까우니 봄눈 대신 봄비를 기다려 보기로 한다.

비읍(ㅂ)은 미음(ㅁ)에 새싹 두 개가 위로 비쭉 돋아난 것처럼 생겼다. ‘몸’에 뾰족뾰족 새싹 돋아나면 ‘봄’이라고 생각하니 묵은 몸이 근지럽다. ‘봄비’엔 새싹이 네 개이지만 소리 나는 건 [봄삐]이니까 발음하는 순간 새싹이 여섯 개로 늘어난다. 달리 보면 ㅂ은 꼭 빗물이 반쯤 찬 컵처럼 생기기도 했고, ‘비’의 모음 ‘ㅣ’는 내리는 빗줄기 그 자체로 보이기도 한다. ‘비가 내리네’에 쓰인 모음이 모두 세로획인 것도 괜스레 그런 내력에 따른 것만 같다. 이처럼 무익해서 무해한 동심의 놀이가 나는 좋다.

봄비를 보며 “키 큰 봄비와/ 키 작은 봄비가/ 소곤거리며 함께 내리네”라고 쓴 이는 송찬호 시인이다. 얼마나 너그럽고 반가운 마음으로 보아야 저런 것이 다 보일까. “키 큰 봄비는/ 작년에도 왔던 비/ 작년 한 해만큼/ 훌쩍 커 버린 비// 키 작은 봄비는/ 올봄에 새로 오는 비/ 파릇파릇 새싹 같은/ 연초록 봄비”(‘봄비’ 전문)란다. 새봄초등학교 새 학년 첫날 갓 입학하고 등교하는 1학년 2학년 봄비들 같다. 턱없으나 갖고 싶은 마음이다.

봄비가 한 번 지나고 나면 새싹은 놀라운 기세로 번져 나간다. 유강희 시인은 그것을 ‘뾰’ 한 글자로 재치 있게 담아냈다.

“뾰뾰뾰 뾰뾰뾰뾰/ 뾰뾰뾰 뾰뾰뾰뾰/ 뾰뾰뾰, 뾰뾰뾰뾰뾰”(‘봄’ 전문) 자음은 ㅁ→ㅂ→ㅃ으로 자라나고, 모음은 ㅡ에 싹이 돋아나 ㅗ, 싹이 하나 더 늘어 ㅛ가 되었다. 그게 바로 ‘뾰’란 글자란 듯이. 새싹은 ‘뾰’족하게 올라오고 알에서 깨어난 새끼 새는 ‘뾰’ 하고 운다. 식물성과 동물성, 봄의 다산성과 생명의 명랑성이 ‘뾰’ 한 글자에 다 들어 있는 게 놀랍다. 손으로 쓰면 획이 무려 11개나 되며, 22글자밖에 안 되지만 242획이 들어갔으니 짧지 않은 시다. 3행 “뾰뾰뾰,”에 쓰인 반점(,)도 절묘하다. 순조로운 봄의 행진을 막는 꽃샘추위의 일시 정지를 표현한 것 같아서다. 그 뒤에 오는 마지막 음보에는 “뾰”가 한 글자 더 붙었다. 꽃샘추위 뒤에는 봄의 속도와 생산성이 한층 더 붙게 마련인 것처럼.

정확히 보름 뒤면 키 큰 어린이와 키 작은 어린이가 재잘재잘 함께 입학하고 등교하기 시작한다. 방주현 시인은 입학식 다음 날, 1학년 어린이 혼자서 학교 앞의 혼잡을 뚫고 가는 모습을 이렇게 그렸다.

“입학식 다음 날/ 공부 마치고 교문 앞에 갔더니/ 엄마 할머니 사범님 학원선생님 할아버지/ 학원엄할마선생님머니엄사할범마아버지님/ 교문이 꽉꽉 막혔다// 우리 엄마는 없다/ 괜찮아, 나는 1학년// 학원엄할마선생님머니 나 엄사할범마아버지님// 뚫고 간다”(방주현, ‘혼자 갈 수 있다’ 전문)

입학식 일주일 뒤는 대통령 선거일이다. 그 중간이 경칩이다. 겨울잠에서 깨어난 개구리들도 “가갸 거겨/ 고교 구규/ 그기 가.// 라랴 러려/ 로료 루류/ 르리 라.”(한하운, ‘개구리’ 전문) 왁자지껄 공론장을 펼치는 때다. 기후 위기와 전쟁 위기 같은 지구적 위기 안에 지역 세대 젠더 갈등과 충돌의 위험 요소가 촘촘하고 빡빡하게 우리를 압박하며 둘러싸고 있다. 위와 아래와 사이 모두를 민감하게 살피지 못하는 리더십으로는 “학원엄할마선생님머니할범마아버지님” 같은 난마를 뚫고 나가기 어렵다. “봄이 오고 있다는 것만으로 세상이 나아지고 있다는/ 생각”(고영민, ‘봄의 정치’)은 힘없고 가난하여 아름답고 순정하다. 무해한 동심의 놀이, 어린이, 소수자들 같은 ‘봄의 정치’를 안전하게 보호하고 세심하게 존중하는 정부를 우리가 가질 수 있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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