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안 화력발전소에서 일하다 숨진 노동자 고 김용균씨의 어머니 김미숙씨가 2018년 12월17일 오후 서울 종로구 청와대 분수대 앞 기자회견에서 눈물을 흘리고 있다. 백소아 기자 thanks@hani.co.kr
[세상읽기] 신진욱 |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
며칠 전 ‘김용균’의 소식을 다시 들었다. 2018년 겨울에 이 청년은 발전소의 위험한 환경에서 정비 작업을 하다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특별조사위원회는 위험을 외주화하고 노동자에게 책임을 묻는 원하청 구조를 범인으로 지목했다. 회사들이 서로 안전 대책을 떠넘기며 결국 노동자에게 다 맡기는 구조 때문에 사람들이 죽고 또 죽었다. 그러나 지난 10일 열린 재판에서 당시 원청업체 대표는 이번에도 무죄 판결을 받았다.
‘구의역 김군’ 어머니의 호소를 기억한다. 2016년 서울 지하철 정비노동자였던 김군은 스크린도어 수리 작업 중 사고를 당했다. 회사는 규정을 미준수한 본인 과실이라 했다. 어머니는 기자회견에서, 진실을 밝혀 아이의 원한을 풀고 보낼 수 있길 힘없는 부모로서 간절히 부탁한다며 오열했다. 우리 사회는 이렇게 수많은 힘없는 사람의 가슴에 원한을 심으며 중단 없는 전진을 한다.
고용노동부 통계로 2020년 한 해 동안 산업재해로 인한 사고·질병 사망자 수는 총 2062명이다. 이 나라에선 하루 6명이 일하다 죽는다. 이뿐이겠는가? 죽지 않아 산업재해로 인정받지 못한 더 많은 고통이 있다. 평생을 가는 경쟁 압력, 미끄러지면 끝이라는 불안, 벗어날 수 없다는 절망이 수많은 사람의 몸과 마음을 병들게 한다.
경제성장률 1위, 수출증가율 1위를 자랑한다는 이 선진국에서 자살률, 빈곤율, 산재사망률이 세계 1위를 다툰다. 기업은 이윤만을 추구하고, 정치는 부유층과 중산층의 이익만 대변하는 계급동맹이 지금의 한국 사회를 만들었다. 돈이 목적이 된 배금 자본주의, 사회적 약자를 자본의 제단에 바치는 인신공양의 자본주의, 낸시 프레이저가 이름 붙였듯 우리 삶의 모든 가치를 잡아먹는 식인 자본주의다.
이 체제를 바꾸기 위해 누구와 싸워야 할까? 사람들은 이미 명확하고 구체적인 실체와 싸우고 있다. 사 쪽 대표, 관리자, 용역 깡패, 알바 사장, 갑질 상사, 진상 손님 같은 대상 말이다. 그러나 페테르 바이스가 썼듯이, 노동의 일상은 이런 구체적인 것들을 명명할 ‘명칭과 언어’를 결여하고 있다. 그 빈자리에서 정치인과 기업·문화 엘리트들은 체제의 실체를 가리는 가상의 괴물을 창조하고 속삭인다. ‘저들이 너의 돈과 집과 일자리를 빼앗았다.’
하나의 괴물은 ‘기성세대’라는 이름을 가졌다. 단군 이래 최초로 부모보다 자식이 가난한 시대라는 기괴한 세대유기체론으로 마치 부모와 자식이 각기 다른 계급인 듯 호도한다. 한국 사회 비정규 노동자의 50%, 산재 사망자의 70%가 50대 이상이다. 단군 이래 최초인 것은 청년세대 내의 충격적 양극화다. 그들 부모 세대 양극화의 대물림이다. 그런데도 정당들은 청년팔이를 하며 기성세대라는 저주인형을 만들어 세대놀이를 한다.
다음 괴물은 ‘노조’다. 불안정 일자리를 만들고 노동자들끼리 경쟁을 시켜 이윤을 취하는 기업들과 그들의 친구인 정치권이, 노동자를 위한다며 노조를 비난하는 광경은 우습다. 안정집단이라 할 만한 대기업 정규직 노조원은 전체 취업자의 4%에 불과하다. 최근 생긴 노조의 다수는 중소기업이나 청소·경비 등 비정규 노동자, 특성화고 학생들 같은 사회적 약자들이다. 이들에게 노조란 생존을 위한 작은 무기다. 그것마저 빼앗지 말라.
마지막으로 그들이 만들어낸 가장 무서운 괴물은 바로 ‘나’다. 대학 못 간 것, 학벌 나쁜 것, 직장 못 구한 것, 수입이 변변찮은 것, 내 집 마련 못 한 것, 사십대에 직장 나온 것, 식당 차렸다 망한 것, 노후 준비 못 한 것, 기계에 잘린 것, 떨어진 것, 깔린 것, 끼인 것, 아픈 것이 모두 ‘나’의 책임이라고 이 사회는 말한다. “너의 잘못이 아니야”라는 말은 그래서, 가녀린 위로가 아니라 체제에 대한 저항이다.
이산하 시인의 시 ‘지옥의 묵시록’에서 이런 구절을 본다. “정신착란 증세로 10년 동안 식물인간처럼 살았지만/ 마지막에는 신 없이도 죽을 수 있었던 니체는/ 어느 추운 겨울날 아침 토리노의 골목을 산책하다가/ 늙은 마부의 모질고 잔인한 채찍질에도/ 비명 없이 꼼짝도 않는 말의 목을 끌어안고 울었다/ 나는 저렇게 표면이 심연인 듯 울어본 적이 없었다.”
도처에서 생의 표면에 탄식과 울분의 심연이 덕지덕지 붙어 있다. 한때 사람들은 사람이 먼저라는 말을 끌어안고 운 적이 있었다. 지금은 늙은 마부가 채찍질을 하려 한다. 대선이 스무날 남았다. 선거운동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