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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기생수’와 대면하기

등록 2022-02-16 17:05수정 2022-02-17 02:33

넷플릭스 드라마 <지금 우리 학교는>의 한 장면. 넷플릭스 제공
넷플릭스 드라마 <지금 우리 학교는>의 한 장면. 넷플릭스 제공

[세상읽기] 조문영|연세대 문화인류학과 교수

넷플릭스 드라마 <지금 우리 학교는>을 보다가 “기생수”란 표현에 움찔했다. 좀비를 피해 간신히 방송실로 피신한 나연이 같은 반 경수한테 던진 말이다. 기초생활수급자의 줄임말이란다. 위급 상황에서 나연은 경수의 손등 상처를 보고 그가 좀비에게 물렸다고 의심한다. “임대”에 사는 경수가 자기네 아파트 단지를 가로질러 등교하는 게 평소에도 못마땅하던 터였다. 일상의 낙인이 감염의 공포와 뒤섞이면서 의심은 확신으로 둔갑했다. 녹음실에 격리된 경수를 찾아간 나연은 사과는커녕 그를 고의로 좀비에 감염시킨다. “너 같은 것” 때문에 자신이 친구들한테 궁지에 몰렸다고 억울해하면서.

온라인에서 “기생수”를 검색하니 이 뜻이 뭔지 묻는 사람이 제법 많다. 일본의 티브이(TV)만화 <기생수>를 떠올렸다는 네티즌도 있다. 다행이다. 아직 지배적인 혐오 표현은 아닌 듯하다. 하지만 일부 인터넷 커뮤니티에서는 가난을 개인의 무능으로 조롱하고, 수급자의 ‘거지 근성’을 비난하는 표현으로 이 말이 곧잘 등장한다. 수급을 당당한 권리로 선언한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가 시행된 지 20년이 지난 나라에서 벌어진 풍경이다.

“기생수” 표현 때문에 몇년 전 한 학생과 얘기를 나누다 당황한 기억이 되살아났다. 인터뷰 때 수급자 가족임을 언급한 그는, 익명성을 지켜달라며 내게 당부했다. “이런 게 알려지면 제가 안전하지 않아요.” “안전”이라니, 그 순간에 튀어나올 단어라고 상상조차 못 했다. 민주화 이후 한국의 인권 교육과 제도는 급속히 성장했다. 대학에서 ‘선량한 차별주의자’가 되지 않겠다는 학생들의 세심한 노력을 살핀 지 오래다. 성별, 나이, 출신, 지역 등 어떤 이유로도 차별받아서는 안 된다는 내용을 담은 차별금지법 제정은 여전히 오리무중이지만, 그럼에도 광범위한 지지를 얻고 있다. 가난이 알려지면 “안전하지 않다”는 학생의 얘기를 대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스페인의 정치철학자 아델라 코르티나는 난민과 이주자에 대한 적대의 바탕에는 언제나 가난한 사람에 대한 혐오와 두려움이 있다며 이를 ‘가난포비아’라 명명했다. 비자발적 빈곤은 한 개인의 정체성도, 선택의 문제도 아니란 점에서, 그는 ‘가난포비아’가 다른 유형의 증오나 거부와는 다른 독특함이 있다고 말한다. 예컨대 나는 “비장애”, “이성애”라는 명명에 점차 익숙해졌는데, 이는 장애, 동성애를 ‘정상’이 아닌 것으로 바라보는 관행을 문제 삼은 교육의 효과이다. 하지만 같은 맥락에서 나는 “비-빈곤” 같은 표현을 떠올린 적도, 그런 교육을 받아본 일도 없다. 자본주의 세계에서 경제 성장과 발전은 성취이고, 그 이념은 공기처럼 당연해서일까? 부자 되라는 기원은 건강 못지않게 두루 오가는 새해 덕담이다. 결핍은 그저 불운이고 수치일 따름이다.

그렇다고 가난포비아에 사로잡힌 사람들을 비난하고 응징하면 그만일까? 그런 순간이 <지우학>에 등장한다. 남라가 나연한테 “너 살인자야”라고 말하고, 역겨운 표정으로 나연을 쏘아보는 친구들을 카메라가 훑는 장면은 모종의 통쾌함을 선사한다. 하지만 모두에게 버림받았다는 생각에 자포자기하듯 떠난 나연을 선생은 끝까지 붙들었고, 결국 그를 대신해 좀비의 희생양이 되었다. “너도 애들도 다 무서워서 그런 거야… 나중에 친구들한테 돌아가서 미안하다고 말해… 꼭 살아. 살아남아서 이번에는 네가 친구들을 도와줘.” 좀비로 변하기 직전 선생이 남긴 말이 나연을 움직인다. 친구들에게 줄 음식을 챙기며 용기를 낸 나연이 결국 귀남한테 물어뜯기고 카메라가 그의 신발로 거침없이 쏟아지는 피를 클로즈업하는 장면은 그래서 더욱 섬뜩하고 안타깝다.

구조적 불평등이 똬리를 튼 자본주의 세계에서 가난한 사람을 혐오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 하지만 빈곤의 낙인화가 생산성을 최상의 가치로 받든 자본주의 세계의 당연한 귀결이라면, 이 세계의 다수는 사실상 연루자, 공모자다. “기생수” 표현에 발끈하며 혐오 바이러스를 질타하고 대응책을 급조하는 것만이 능사는 아닐 것이다. 신분 하락의 공포와 상대적 박탈감, 생존주의적 경쟁이 취약한 사람들 간의 차별을 부추기는 게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다급한 상황에서도 나연 곁에 남아 반성의 계기를 터준 선생의 역할은 그래서 소중하다. 이슈화도, 이에 대한 대응도 너무 빨리 진행되는 디지털 시대에 감당하기 힘든 역할이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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