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결] 강도희·최연진
대학원 석·박사 과정(국문학)
대선이 3주도 채 안 남았다. 친구들과 선거 얘기를 하면 공기가 달라진 것을 느낀다. 얼마 전만 해도 누가 되든 별로라며 시큰둥했는데 그 누가 내 일상에 미칠 영향력을 생각하니 사태가 제법 심각하다. 전략적으로 표심을 잡기 위해 구조적 성차별을 부정하고 여성 안전 정책을 부러 마련하지 않으려는 의지들을 보면 더 그렇다.
90년대생 2030은 어느 세대보다도 미래가 불확실한 세대다. 고쳐 말하자. 미래의 불확실성에 대한 감각이 남다른 세대다. 다가오는 시간을 미리 알 수 없는 건 누구나 같다. 팬데믹이 언제 끝날지, 다음 정권의 부동산 정책이 서울 집값을 낮출지 더 올릴지, 2050년 탄소중립을 과연 달성할지 예측은 해도 확신은 아무도 못한다. 그런데 불확실한 미래를 ‘기대’하고 뭐가 됐든 더 기다릴 수 있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불확실하기 때문에 불안하고 지금 무엇이라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사람이 있다. 이 차이를 구세대는 축적된 경험에서 오는 예측 가능성이라고 볼 것이다. 물론 나이가 많을수록 생애에서 수집한 데이터의 양이 많고 그 안에서 반복되는 패턴들을 발견하는 건 당연하다. 교수나 법조인, 대기업 임원 등 유사한 배경의 사람들로 이뤄진 전통적 고소득 전문직 집단에서 평생직장을 가졌다면 더 그럴 것이다.
그런데 더 중요한 차이는 그런 경험적 데이터의 양이 아니라 청년에게 다가올 미래가 과거 데이터로 예측할 수 있는 종류가 아니란 것이다. 집값이 안정되려면 10년, 20년 뒤에도 가격이 크게 오르지 않을 거라는, 나중에 사도 괜찮다는 확신이 들어야 하는데 실상은 그렇지 않다. 외려 어찌 됐건 부동산은 오른다는 신자유주의 이념 아래 공유된 믿음이 부유층의 패닉 바잉을 조장하고, 그 결과 전월세 청년들의 미래 주거 계획은 더 요원해진다. 당장 2년 뒤의 상황도 집주인이 임대료를 얼마나 올릴지에 따라 크게 달라진다.
노동 환경도 마찬가지다. 노후에 많이 쉬려고 지금 주 120시간씩 일하고 싶은 사람, 이젠 없다. 낮은 임금, 고용 불안정, 전망 부족 등의 이유로 매년 새해 목표로 퇴사나 이직을 부르짖는 청년 직장인들에게 60살이든 65살이든 정년은 먼 세계다. 단순히 시간적으로 멀다는 뜻이 아니라 정말 ‘삶’이 있을지 모르겠다는 이야기다. 한국에서 미래를 예상 가능한 것으로 만드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부모가 되는 것인데, 익숙한 과거의 반복이자 남은 생애에 대한 최소한의 확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혼 남성의 40.8%, 여성의 22.4%만이 결혼은 필수라고 생각하는 마당에 중노년기를 누구랑 보낼지, 아이일지 노인일지, 여성일지 남성일지, 동물일지 식물일지 지금 예측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다.
우리가 확신하고 싶은 건 그런 구체적 삶의 형태가 아니라 누구와 살든 인간답게 살 수 있는지 여부다. 수도권과 지방 간 응급진료자원 격차는 갈수록 커지고, 국민연금은 이대로 가면 1992년생이 연금을 받는 나이가 되면 고갈된다. 지구는 갈수록 뜨거워져 ‘기후변화에 관한 정부간 협의체’(IPCC) 보고대로 2040년까지 평균온도가 1.5도 상승하면 대형 가뭄과 폭우가 지금보다 2배가량 는다. 지구 평균보다 온도가 빨리 상승하는 한반도는 한달간 폭염과 열대야가 계속될 수도 있다. 이토록 여행을 바라는 많은 섬들이 사라지고, 커피나 와인을 더 마시지 못할지도 모른다.
대선 후보의 평균 연령과 계급을 따져봤을 때 그런 불안을 이해할 수 있는 위치의 인물은 많지 않다. 그렇다면 적어도 불안해하는 이들을 가까이에 두고 ‘공감’은 해야 하지 않을까. 윗세대가 ‘나중은 없다’는 청년의 불안을 무지나 생존주의와 같은 세속적 태도로, ‘나중엔 다 좋아진다’는 본인들의 낙관을 지식이나 탈속으로 착각하는 태도를 볼 때 나는 더 불안해진다. 예측이 신념이 될 때 변수, 혹은 변수를 제기하는 타인은 쉽게 적이 되기 때문이다.